.

Lee KwanYong (이관용 박사) - 독립운동가, 교육자, 언론인  

[이관용]에 대해서 Wikipedia에 다음과 같이 언급되고 있다. 

"이관용](李灌鎔, 1894년-1933년)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언론인, 교육자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의 부위원장으로 김규식 등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의 한국인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여했고, 한국사회당 대표로 국제사회주의자회의에도 참여했으며 구미위원부 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1921년 스위스 [취리히 대학]에서   한국인 최초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다른 이름은 이관용(李灌溶,  李瓘鎔, 李鑵鎔, 李冠鎔, 李灌龍) 등의 이름을 사용했다.                         

생애 -  자작(子爵) 이재곤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관립 한성학교 (官立漢城學校)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동경부립 제4중학교 (東京府立 第四中學校)에 입학했다. 그러나 동 중학교도 중퇴하고 말았다. 그 뒤 조선에 돌아와 경성전수학교에 편입, 1913년 3월 경성전수학교 (京城專修學校)를 졸업하고, 영국으로 건너갔다.  1914년3월  옥스퍼드 대학 (University of Oxford) 문과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였다.  1916년에 스위스의 [취리히대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초 프랑스의 파리로 건너와 1919년 4월에 김규식 등과 함께 파리에서 임시정부 파리위원부를 조직하고 파리위원부 부위원장이 되어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해 7월 17일 국제사회주의자회의에 조소앙과 한국사회당 대표로 참석하여 ‘한국독립승인요구안’을 제출하였고, 이후 8월부터 파리위원부 위원장 대리로 활동하다 1919년 9월에 파리위원부와 한인위원회가 통합되어 구미외교위원부가 되자 구미외교위원회 주불대표부의 직원이 되었다. 그러나 그해 10월 10일에 사임하였다.

그러나 1920년 1월에 대한적십자사 구주지부장 (大韓赤十字社 歐洲支部長)으로 스위스의 국제적십자회 (國際赤十字會)에 참석하여 일본정부 적십자사 (赤十字社)에 대한 항의서를 제출하였고, 동년 10월 12일 ‘국제연맹옹호회 연합대회’에 참석하였다. . . .

1921년 스위스 취리히 대학에서 "의식의 근본 사실로서의 의욕론"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23년 독일, 프랑스, 미국 등을 견학하고 한국에 돌아와 활동 중 동아일보에 입사, 신문기자가 되고, 1923년 5월부터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문과에 강의를 했다.

1925년 2월에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출국, 모스크바로 건너갔다. 3월부터 동아일보 유럽 특파원으로 러시아, 유럽에서 취재활동을 하였고, 1925년 7월에 베를린대학 재학 중인 동생 이운용 (李沄鎔)과 함께 조선에 돌아왔다. 조선총독부 정탐의 보고에 의하면 조선에 돌아오는 도중 상하이 (上海)에 들러 기호파 독립운동가인 이시영 (李始榮) 등과 회견한 적이 있다고 한다..

1927년 1월 19일 신간회(新幹會)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2월 신간회 간사로 선출되었다. 이후 신간회의 간사로 활동하다가 1929년 10월 광주학생사건과 관련해 신간회 간부들과 같은 해 12월 일제 관헌을 규탄하는 민중대회를 개최코자 결의문 배포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년 6월을 받고 1932년 1월 22일 가출옥(假出獄) 되었으며, 1933년 8월 14일 함경북도 청진에서 익사(溺死)하였다. 민족시인 이육사의 친동생 이원조가 이관용의 사위이다." http://ko.wikipedia.org/wiki/%EC%9D%B4%EA%B4%80%EC%9A%A9

=

1921년 취리히대학에서 박사학위 취득 - 100주년 기념 

     ©ZurichTourism – 이관용씨가 박사취득을 한 [취리히 대학교]의 본관 모습

 이관용씨는 스위스 [취리히대학교] (University of Zurich)에서 수학을 한 후에 1921년8월27일에 Koreaner (고려인, 조선인, 한인)로 처음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의유럽유학은 1913년에 영국에 와서 처음 옥스포드 대학에서 수학하였으며 1917년에 스위스의 [취리히대학교]로 옮겨서,  여러 교수들의 강의를 들으면서 논문을 작성하여 학위를 취득한 것이다. / www.matrikel.uzh.ch/active//static/12946.htm  & www.uzh.ch/index_en.

뜻이 있는 논문으로 여기고 더 언급을 하여 본다. 원문제목과 취급한 순서와 문헌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Das Wollen, als Grundtatsache des Bewusstseins (의식의 근본사실로서 욕망론 )

Inhalt / 내용

I Einleitung / 서론                                                   

       Der Gegenstand der Untersuchung           

  1. Die gegenständliche Willenstheorie  - 1. Herbart, 2. Münsterberg                            3. Ebbinghaust
  2. Die emotionale Willenstheorie - 4,   Wundt
  3. Die conative Willenstheorie - 5. Jodl

   Kritischer Überblick                              

II. Die experimentelle Untersuchung

    Methodologisches und Versuchungsanordnung

   A. Das Verhalten der Versuchungspersonen

   B. Das Versuchungsergebnis

   C. Die Angeben der Versuchungspersonen

   D. Interpretation der Versuchungsergebnisse

III. Theoretische Betrachtungen                                      

  1. Das unmittelbar Gegebene
  2. Das Hervortreten der subjektiven Lebensbestätigung im Bewusstsein
  3. Das Wollen als das Bewusstwerden der Lebensbestätigung des Ich
  4. Der Willensprozess als Entwicklungsprozess 84       

= =                      

Literatur (문헌

Die Grundgedanken dieser Untersuchung hängen mit den philosophischen und psychologischen Vorlesungen von G. F. Lipps zusammen, ausserdem wurden benutzt:

  • Ach, Narziss Über die Willenstätigkeit und das Denken, 1905
  • --- Willensakt und Temperament, 1909
  • --- Über den Willensakt , eine Replik, 1910
  • --- Der Wille, Handwörterbuch der Naturwissenschaft
  • Herbart, J. F. Lehrbuch zur Psychologie, herausg. von G. Hartenstein
  • Ebbinghaus, H. Psychologie in „System. Philosophie“ Sam. „Kultur der Gegenwart, 1913
  • Jodl, F. Lehrbuch der Psychologie, 4. Aufl., 1916
  • Lipps, G. F. Grundriss der Psychophysik, 3. Aufl. 1921
  • --- Die psychischen Massmethoden, 1906
  • --- Mythenbildung und Erkenntnis, 1907
  • --- Weltanschauung und Bildungsideal, 1911
  • --- Das Problem der Willensfreiheit, 2. Aufl., 1919
  • Münsterberg, H. Die Willenshandlung, 1888
  • Natorp, Paul Allgemeine Psychologie, 2. Aufl., 1910
  • Wundt, W. Grundzüge der physiol. Psychologie, 6. Aufl. 1908     
  • --- Grundriss der Psychologie, 12. Aufl. 1914
  • --- Essays, 2. Aufl. 1906
  • --- Einleitung in die Psychologie, 3. Abdr., 1913
  • --- Philosophische Studien, Bd. I und VI
  • Baldwin, J. M. Mental development in the child and in the race, 1896
  • Bergson, H. Introduction to metaphsics, transl. by T. E. Hume, 1913
  • Dessoir, M. Abriss einer Geschichte der Psychologie, 1911
  • Höffding, H. Esquisse d’une Psychologie, 4. Danoise, tr. Par Löon, 1900
  • Hume, D. Treatise on human nature
  • James, W. Principles of Psychology, II. Bde, 1839
  • --- Pluralistic Universe, 1916
  • Külpe, O. Grundriss der Psychologie, 1893
  • --- Lehre vom Willen in der neueren Psychologie, 1888
  • Lipps, Th. Leitfaden der Psychologie, 3. Aufl., 1909
  • Lotze, H. Mikrokosmos , III. Bd.
  • Mach, E Beiträge zur Analyse der Empfindung, 6. Aufl. 1911
  • McDugall, W. Psychology, Home University Library
  • --- Introduction to social psychology, 13th, 1918
  • Paul, R. Psychologisches Vollpraktikum, 191
  • Pfänder, A. Das Bewusstsein des Wollens, Zeitschr. Für Psychologie, XVII.
  • --- Phänomenologie des Willens, 1900
  • , J. Psychology, Encyclonaedia Britanica, 11th Bd. 1911
  • Wentscher, E. Der Wille, 1910
  • Windelbrand, W. Willensfreiheit, 2. Aufl., 1905     

= = 

Curriculum vitae / 이력

Geboren 1893 in Seoul, Korea, erhielt ich, Kwanyong Lee, bis 1904 die allgemeine Erziehung zu Hause unter Privatlehrern und besuchte1905–1907 die Regierungsschule zu Seoul und 1907-1910 die städtische Mittelschule zu Tokyo, Japan. Ich liess mich in die Juristische Akademie „PopHakKyo immatrikulieren in Japan 1910 und absolvierte dieselbe 1913.

1914-1916 studierte ich poöitische Geschichte an der Universität Oxford, wo ich die „Responsions“ und „Moderations“ bestanden habe. 1917 liess ich mich an der Universität Zürich immatrikulieren und hörte die Vorlesungen der Herrn Professoren Freytag, Lipps und Schlaginhaufen und der Herrn Privatdozenten Suter und Dürr.

1893년 한국 서울(Seoul)에서 태어난, 나, 이관용( Kwanyong)은 1904년까지 집에서 개인 교사로 일반 교육을 받았고, 1905년에서 1907년까지 서울에서 공립학교를 다녔으며, 1907년에서 1910 년까지 일본 Tokyo에서 시립중학교를 다녔다. 1910년에 [법학아카데미] (법학교)에 등록하였으며, 1913년에 동 아카데미를 졸업했다. 1914년-1916 년 사이 나는 영국 [옥스포드 대학]에서 [정치사]를 공부했으며 [Responsions]와 [Moderations ]에 합격했다. 1917년에 스위스 [취리히 대학]에 등록학고 Freytag, Lipps, Schlaginhaufen 교수들과 Suter와 Duerr강사들의 강의를 들었다.

= =

상부의 위키백과에 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이 되고 있다.

“이 관용 (李灌鎔, 1994-1933)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언론인, 교육자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의 부위원장으로 김규식 등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의 한국인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여했고, 후에 구미위원부 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1921년 스위스 취리히대학에서 한국인 최초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한자의 이름은 李灌溶, 李瓘鎔, 李鑵鎔, 李冠鎔, 李灌龍 등의 여러 가지 사용했다.”

그러나 다른 자료에 보면 출생 년도가 1993년으로 된 것도 있고 또한 박사 취득도 1923년으로 되어있으며, 논문의 제목이 한글로만 [의식의 근본 사실로서의 의욕론]”라고 언급되어 있었다. 

얼마 전에 [취리히대학교의 등록 기록문]을 보게 되었는데 학위 통과의 정확한 일자로  1921년 8월 27일로 알게되었다.  똣이 있는 박사논문이기에 좀 더 언급을 하여 본다.

이전에 유럽에서 한국인으로 학위를 받은 사람을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첨부된 이력서에 보면 출생 년도가 1893년이 아니고1894년으로 되어 있다.

그는 안타깝게도 사고로 일찍 사망하였지만 여러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긴 한국인이다. 즉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가, 언론인, 교육자로서 활동을 했다. 1919년 [파리평화회의] 때, 대한민국임시정부 파리워원부의 부위원장으로, 1920년1월에 한국적십자사의 [구주위원장]으로 참가 등으로 활약했다. 

2008년에 [독립유공자]로 선정이되었다. 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  /  http://mpva.go.kr/narasarang/gonghun_view.asp?id=11766&ipp=10

취리히 대학교에 대한 (위키백과에서) / http://en.wikipedia.org/wiki/University_of_Zurich

조사의 주제 (主題)

Aristoteles는 이미 순전히 심리학적으로 의욕의 본질을 결정했다. “그는 먼저 욕망의 순수한 관능적이고 이해가 많은 욕구의 본질을 구분을 했다.  이것은 항상 객관적인 내용 외에도 주관적인 외관(外觀) (즐겁거나 또는 불쾌한)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느낌이 주어지며, 이는 느낌이 즉시 원하거나 또는 거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에 대한 다른 한편으로는, 이 두 행위는 최종적으로 수용하는 것, 또는 그것에 반대해서 기대하는 것을 시야에 넣어서 예시화상(畵像)의 손에 발생하는 배려에 의해 중재된다. 이 과정에서 실제의 욕망의 경우 항상 닫혀 있다. 그러나 같은, 따라서 행동의 실제 욕망이 일(작품)에 직접 욕망을 넣는 힘의 확실성에 의해서 복합 될 때 주어진다. 행동 자체는 이제 운동으로 욕망의 전환을 통해 일어난다. 1)      

그렇게 함으로써, Aristoteles는 의지가 인간의 역동적인 욕망의 표현을 무산시킬 것이라고 믿고 있는 의지의 종래의 개념을 극복했다. 일반적으로 살아 있는 존재, 한편으로는 욕망의 리더십에서 중요성을 인식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의지과정의 본질이라고 생각하거나 생각할 때 주로 지적으로 의지를 취한다.

 이 견해는 인간에서 식물성 (영양), 느낌, 욕구, 움직이는 힘으로 구성된 동물의 혼에 가해서 합리적인 (이성)을 나타낸다라는 유언이 이성의 본질에 속한다는 전제와 일치한다.  현대의 심리학에서도 의지의 개념은 다음의 짧은 위치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과 같이 일반적으로 정신 생활의 개념에 의존한다.      

의지의 현재 심리학의 수 많은 방향은 2 가지 주요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한편으로는 의지의 이질적인 이론은 우리들이 욕구, 열망, 욕망이라고 부르는 것을 주장하지만 의식의 독특한 현상을 구성하지만 감각과 감정과 비교할 수 없는 품질이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현실과 효과성은 일반적인 이유로 거부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의지가 결정된 “감각의 그룹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로 우리를 이끈다. 아이디어 또는 감정에서 의지의 과정, 정서적인 복합체에 활력을 아이디어, 다른 한편으로는 감정과 감정에 더한 1차적인 경험을 보고 의지의 자기 유전학적 이론이 있다.   = = 

박사학위 논문 지도 교수: Prof. Dr. Gottlob F. Lipps (1865 – 1931)

Lipps 교수는 김나지움 을 Zweibruecken에서 다녔으며, 1883년에서 1887년까지 수학, 문리, 촐학 및 심리학을 Leipzig 대학의 W. Wundt교수 밑에서 그리고 다음은 Muenche대학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고등학교 교사 자격증 시험에 합격한 후에 1888년에 Leipzig대학 철학부로부터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Haegenau인문고등학교]와 1893년부터 1902년까지는 [Strassburg의 실업고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1902년4월5일이후 Leipzig에 새로 설립된 [Koenigin-Carola-Gymnasium전문학교]에 수학 및 문리과목의 수석교사였다. 1904년에 [Leipzig대학]에서 Habilitation (대학교수자격증)를 받았으며 드디어 대학에 강사로서 강의를 했다. 1909년에서 1911년까지 Leipzig대학교 문리대의 철학과를 위한 부교수가 되었다. 그는 1911년에 Zuerich대학교에 철학과 및 교육학을 위한 정교수 겸직으로 심리학연구소의 소장으로 초빙되었다. 또한 그는 심리문리학과 함께 실험적 방법론을 취급했다.  / Lipps, Gottlob F. / www.paedagogik-feiert.uzh.ch/de/personenbiographien/lippsgottlobfriedrich.html

= = 

논문의 제1장에 인용한 학자들의 간략한 공적들을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헤르바르트(Herbart, J. F., 1776-1841) – 독일의 교육자, 심리학자

북독 Niedersachsen주의 서쪽에 위치하는 Oldenburg에서 1776년5월4일에 태어나다.  12살까지 집에서 어머니로 가정교육을 받았다.  후에 예나(Jena)대학에서, 유명한 철학자 피흐테(Fichte) 밑에서 공부를 했다. 칸트(Kant)와 쉘린(Schelling)의 작품들을 읽었다. 당시 가정교사를 하고 있을 때, 자기가 가르치는 아이들을 데리고 스위스의 교육자 페스탈로찌의 학교를 방문하고 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3년간 그리스어와 수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브레멘(Bremen)에 갔다. 1802년에 대학교수 자격을 취득하고 괴팅겐(Goettingen) 대학에서 강사로 철학 강의를 했으며(1805), 후에 원외 교수가 되었다. 1809년에 Kant가 취임해 있는 쾨니히베르크(Koenigberg)대학의 철학 및 교육학의 강좌에 교수로 초빙되어 1833년Goettingen대학에 초빙되기까지 24년간을 거처 대학에는 부설 교육학 세미나에 교사의 육성에 노력함과 동시에 대외적으로는 [학교참사관]으로 프로이쎈(Preussen) 왕국의 학교개혁 등에 종사했다. 1833년에 다시 Goettingen대학에 돌아와서 후에 학부장의 임무를 하게 되었는데 1837년에 [괘팅겐 대학 7인 교수사건]이 일어났는데, 항의한 교수들을 옹호되지 못함을 비난 받아 실의한 상태에 1841년에 사망했다. 묘소는 괴팅겐의 Albani-Friedhof에 있다.       

교육의 목적을 논리학에서, 방법은 심리학에서 추구해서 교육학을 체계화했다. 교육의 방법으로서 [관리], [교수], [훈련]의 3요소 [교육적 교수]를 제창해서, 교육의 목표는 경고한 도덕적 품성과 흥미의 다면성의 도야에 있다고 했다.  [국민학교]를 설립한 [페스탈로찌], [유치원]을 설립한 [프뢰벨] (Froebel, Friedrich W., 1782-1852)과 함께 [헤르베르트], [중고등학교]의 설립자로 현대 교육제도를 설립한 세계 3대 교육자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 = =

뮌스터베르크(Muensterberg, Hugo, 1863–1916) - 독일계 미국인 심리학자                

Muensterberg는 당시 [독일령]인 Danzig (현재 폴란드의 Gdansk)에서 1863년6월1일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대인으로 러시아에서 목재를 사서 영국에 파는 무역상을 운영했다. 모친은 예술가였으나, 4명의 아들을 키우면서 일을 계속했다. Hugo의 심리이론의 형성에는 예술적 환경도 영향을 받았다고 여긴다. 김나지움을 1882년에 졸업한 후. Leipzig대학의 분트(W. Wund)t 교수에서 심리학을 배웠다. 후에 Heidelberg대학에서 의학을 수업했다. 1887년부터 Freiburg대학에 강사로 근무했으며 1891년에 교수로 승진되었다. 사생활로서는 1887년8월7일에 슈트라우스 출신의 Selma Oppler와 결혼했다.

1891년에 개최된 제1회 [국제심리학회의]에 출석해서 제임스(W. James)교수를 만났다. 그의 초청에 의해서 1892년부터 3년가의 약속으로 Harvard대학 심리학강좌의 교수로 임한다. 1895년에 일단 Freiburg로 돌아 왔으나, 1897년부터 다시, 새로 창설된 응용심리학강좌의 교수로 Harvard대학에 복귀한다. 1898년에 [미국심리학회의 회장]에 선출된다. 1910년에 Harvard대학의 교환교수로 Berlin대학에 파견된다. 1916년 Harvard의 강의 중에 급사한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 고향의 독일을 옹호하는 발언으로 미국 지지자로 공격을 받은 경우도 있다.     

산업심리학 (産業心理学) : 1913년의 저서 [심리학과 산업효률]에 있어서, 심리적 사회적 요인이 노동 효률에 주는 영향이란 관점에서 고찰했다. 광고의 효과에 있어서도 분석하고, 경제심리학의 장래의 발전을 준비했다.                    

임상심리학 (臨床心理学) : Muensterberg는 모든 심리적 과정에는 대응하는 뇌의 프로세즈가 있으며, 심리학적 병행론을 신봉하고 있었다. 따라서 정신질환에는 심리학적 원인이 있으며, 행동관찰을 환자와 면접에 기초해서 진단이 된다. 이런 고찰을 기본으로 Muensterberg는 1909년 [심리요법]이란 제목의 책을 썼다. 

응용심리학 (応用心理学) : Muensterber는 재판에의 심리적 정보의 응용에 대해서도 몇 편의 논문을 썼다. 이런 논문의 많은 주요 대상은 목격 증인의 신뢰성에 관하는 것이다. 1908년 발표의 [증인의 입장에서]는 재판의 결과에 영향을 주는 심리적 요인에 대해서 서술하는 것인데 넓은 논쟁을 불렀다. 

예술심리학 (芸術心理学) : 1915년경부터, 당시까지 새로웠던 영화의 분석에 흥미를 갖고. [극영화] (1916년)에 있어서 영화가 갖는 대중에 영향력을 평가함과 동시에 지각심리상의 착각이 영화의 예술을 보증한다고 했다.      = = =

에빙하우스(Ebbinghaus, Hermann, 1850-1909) – 독일의 심리학자

기억(Gedaechtnis)에 관하는 실험적 연구의 선구자로 [망각곡선](忘却曲線)과 간격효과(間隔效果)을 발견한 것으로 알려진 독일의 심리학자이다. 처음으로 학습곡선에 언급한 인물로 반복학습의 분산효과를 발견하다.

Ebbinghaus는 1850년에 프로이쎈(Preussen)왕극의 라인(Rhein)주 바르멘(Barmen, 오늘날 Wuppertal시 한 구역)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소년 떼 루터파를 신앙하는 도시의 김나지움(Gymnasium)의 생도였다. 17세 때(1867년) Bonn대학에 입학해서 여기서 역사와 언어학을 공부하려 했는데, 철학에 흥미를 가졌다. 1870년에 [보불 전쟁]으로 연구를 일시 중단했다. 1873년에 철학에 대한 논문을 써서 23세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어서 3년간은 Halle/Saale와 Berlin에서 생활했다.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 후에, Ebbinghaus는 영국과 프랑스에서 가정교사로 생계를 이어갔다. 런던의 고서점에서 페흐너(Gustav Fechner)의 저서 [정신물리학요강] (Elemente der Psychophysik)를 접해서 여기에 감화되어 그는 유명한 [기억실험]을 하게 되었다. Berlin대학에서 연구를 시작한 그는 독일의 3번째로 즉 분트(Wilhelm Wundt)와 뮐러(Georg E. Mueller) 다음으로 [심리실험연구소]를 설립해서 1879년부터 자기의 기억연구를 시작하다. 1885년에 그의 기념비적인 저서[Ueber das Gedaechnis Untersuchungen zur experimentellen Psychologie] (기억에 대해서, 실험심리학의 공헌)가 출판되었다. 이 출판물의 공적은 대단히 커서 그는 Berlin대학의 교수로 초빙 되었다. 1894년에 논문 부족으로 Berlin대학 철학부장 승진에 누락되자 Ebbinghaus는 브레슬라우 (Breslau)대학 (현재 폴란드의 Wroclau대학)으로 옮긴다. Breslau에 있는 동안, 그는 아이들의 정신능력이 학교의 수업 날에 얼마나 저하하는가를 연구하는 위원회에 종사했다. 또 그는 Breslau에도 심리실험연구소를 설립했다.

1902년에 Ebbinghaus는 다음의 서적 [Die Grundzuege der Psychologie](심리학의 원칙)를 출판했다. 이 것은 곧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사후에도 호평이 계속 이어졌다. 1904년에 Halle로 돌아와서 그의 인생의 만년이 되는 수년간을 여기서 보냈다. 1908년에 최후의 출판물 [Abriss der Psychologie] (심리학의 개요)가 출판되었다. 이것도 높은 평가가 계속해서 8판의 증쇄가 되기까지 되었다. 이 간행 후에 얼마 되지 않아 1909년2월26일 Ebbinghaus는 폐렴에 의해서 59세로 사망했다.    = = =

뷘트 (Wundt, Wilhelm Maximilian, 1832-1920)  - 독일의 심리학자, 철학자

Wundt는 1832년8월16일에 남독 바덴 지방의 Neckarau (Mannheim근처) 루터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다. 그의 할아버지 Peter Wundt (1742-1805)는 Wieblingen의 지리학교수이며 목사이었다. 그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자란 것이다.  Wundt는 12살에 Tuebingen대학에 입학한다. 고교시절에는 낙제 해서 전교를 할 정도 공부를 싫어했으나 Heidelberg대학 의학부에 입학한 후부터 맹렬히 공부를 했다. 1857년에 같은 대학을 졸업하고, 1858년부터 5년간 헬름홀쯔 (Helmholtz, Hermann von, 1821-1894 독일 생리학자 및 문리학자)의 조수로 일했다.

1862년부터 강사로 [자연과학에서 본 심리학], [생리학적 심리학] 라는 제목으로 강의를 담당했다. 1873년에 [생리학적 심리학 강요]의 전반을 출판했다. 다음해 1874년에 스위스 Zurich 대학의 정교수가 되었고 이어서 1875년에는 Leipzig대학의 철학교수로 초빙되었다. 이제까지의 철학적인 심리학과 다른 실증적인 심리학을 구상해서 [실험심리학] 최초의 책인 [감각 지각설/知覺說 공헌] (1858-1862)를 저서, Leipzig대학의 철학교수를 근무하는 1879년에는 세계에서 아주 초기의 실험심리학의 연구실을 운용했다고 하며, 심리학사의 많은 곳에서는 이 때를 [새로운 학문분야로서의 심리학이 성립]되었다고 한다. 그 실험실에는 유럽, 미국, 일본에서 많은 연구자들이 모이게 되었다. 1881년에는 [철학연구]라는 이름의 책자를 발간했으며, 이것은 후에 [심리학연구 / Psychologische Studien]로 개칭해서 계속된다. Wundt 의 심리학 연구실의 성과를 중심해서 여러 논문을 게재하고 심리학의 발전에 기여했다.  Wundt실험실이 있는 Leipzig이외의 곳으로 옮가지 않고 그 곳에서 88세로 사망했다. 그는 생애에 많은 저작을 했다. 또한 그를 [실험심리학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 = =  

요들 (Jodl, Friedrich, 1849-1914) - 독일의 철학자 심리학

요들 (Jodl, Friedrich)은 바이에른 왕국의 많은 고관들이 임명된 왕실에 가깝운 뮌헨의 가족협회서 자랐다. 가족의 친구인 화가 뷔르켈 (Heinrich Buerkel)는 Jodl의 어린 시절부터 시각예술에 접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Friedrich의 성향은 음악에 관하는 것이었다.  요들은 1867년에 Muenchen에서 역사와 미술사, 특히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의 학술적 교사 중에 철학자 Carl von Prantl, Johann Huber 및 Moritz Carrière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1872년에 David  Hume에 관한 논문으로 철학박사 칭호를 취득했다. 그 후에 Jodl은 뮌헨의 [바이에른 전쟁 아카데미]에서 강사로 근무했다. 이어 그가 철학과를 위한 교수자격시험에 합격한 후, 1885년에 [프라하의 독일대학]에 임명되었다. 1896년에는 비엔나대학 철학을 위한 강의를 맡았으며, [비엔나 공과대학]에서는 미학을 가르쳤다.       

그의 학술적인 업무 외에 Jodl은 [비엔나 국민교육협회]의 회장으로 또한 과학적 지식의 보급과 대중화를 위한 강사로 활동을 하였다. 포이어바흐(Ludwig Feuerbach)에 속한 [양성주의]의 대표자로서 그는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매우 영향력이 있었던 [초 몬타니즘]에 맞서 싸웠고, 과학의 자유와 종파, 오스트리아에서 특히 로마-카토릭교회의 공립학교제도의 영향에 반대한 캠페인을 행하였다. 그는 자유 종교 [독일윤리문화협회]의 공동 창설자였으며, 무엇보다도 종교적 수업 대신으로 비고백의 도덕적 수업을 받은 의무적인 주립학교를 홍보하였다.       

Hodl은 결혼을 하였으나 자녀는 없었다. [Roten Wien] 시기에 대중교육에 대한 그의 봉사를 인정받아, 그의 이름을 떠서 1919년에 Hietzing에 [Jodlgasse] 그리고 1926년에는 Doebling시의 주거단지에 [Jodl-Hof]라 명명되었다. 또한 Friedrich요들에 경의를 표시하기 위해 비엔나대학 명예의 궁정에는 (비엔나의 조각가 Hans Mauer가 만든) 초상화의 흉상이 세워졌다.  

Jodl의 제자로 작가 Stefan Zweig (1881-1942)는 히폴리테 타인 (Hippolyte Taine, 1828-1893)의 철학에 관한 연구로 1904년에 Jodl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후에 알려진 다른 박사과정의 학생으로 오또(Otto Weininger, 1880-1903) 및 프리덴(Egon Friedel, 1878-1938)등이 있다. / https://de.wikipedia.org/wiki/Friedrich_Jodl

이상의 학자들에 대한 간략한 공적에 대한 자료는 Wikipedia에서 참고한 것임.

= =

이관용 박사와 그의 논문에 대한 [철학회연구회]의 논평이 아래와 같이 간단히 언급이 된 것이 있다. 정확한  논평이었는지 한번 검토하여 볼만 하다.

백종현 [독일철학과 20세기 한국의 철학], 철학과 현실사, 2000 (개정판), pp. 45/46

초기 해외 유학생들에 의한 독일철학 유입 (1921-1929)

우리나라 사람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처음 사람들은 모두 독일어 지역에서 수학하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철학박사인 이관용(李灌溶, ?-1933)은 1921년 스위스의 [취리히(Zuerich) 대학]에서 립스 (F. G. Lipps)교수의 지도를 받아 [意慾論 – 意識의 根本事實로서]라는 논문으로 학위를 취득하였다. (김두헌, „故 李灌溶博士 -意慾論 – 意識의 根本事實로서 – „ [철학] 제2호, 철학연구회 편, 1934년, 철학연구회 편, 1934년, 130면 이하 참조 )

이 논문에서 이관용은 근대 심리학의 주류이던 지(知), 정(情), 의(意)의 3분 능력설 (三分 能力說)을 반박하고 의식의 근본사실을 의욕에서 보려 하였다. 의식은 물론 知-情-意 3요소의 서로 떨레야 떨 수 없는 순환 활동이겠지만, 의식의 자발성 곧 자아의 능동성의 근거는 다름 아닌 애씀의 양상인 의욕에 있다는 것이며, 따라서 의욕이 知-情-意 3요소의 궁극적인 바탕이라는 것이다. 이런 그의 주장을 그는 ‚실험적인 연구‘와 ‚이론적인 고찰\을 통하여 입증하려 하였다.  

학위 취득 후 이관용은 바로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에서 논리학-심리학-철학개론 등을 가르쳤다. 1922년에는 동아일보에 „사회의 병적 현상“이라는 글을 연재하였는데, 여기서 그는 사회 유기체론을 피력하였으며, 당시 독일 철학계의 한 기둥이었던 오이켄 (K. Eucken, 1846-1926)의 신관념론 (Neuidealismus)과 제1차 세계대전 때부터 부흥의 흐름을 타던 헤겔 (G. F. W. Hegel, 1770-1831) 철학의 영향을 다분히 받은 것으로 보인다.  (한국철학회 편, [한국철학사] 하권, 400면 참조)

= = = = =

.     

독립운동가로서의 활동

PalaisNations    c)WikipediaPic. - 1920년 창설된 [국제연맹]의 스위스 즈네브 본부 사무국  

이관용의 정치적 활동

제1차대전이 종결되고 1919년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일정이 확정되자 미국과 중국의 한인들은 [파리평화회으]에 대표를 파견하려 시도했다. 미주 [대한인 국민회]는 이승만, 민창호, 정한경을 대표로 선정했고, 이들은 파리행 여권을 구하려 시도하는 한편 외교청원운동을 시작했다. 처음 1918년11월25일 [대한인 국민회] 대표 이승만, 민찬호, 정한경이 우드로 윌슨 (Woodrow Wilson) 미국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이다. 아직 하와이에서 건너오지 않은 이승만 대신 정한경이 주도한 이 서한에서 이들은 [파리평화회의]에서 한국의 민족자력에 대해 거중조정을 해달라고 청원했다. 정한경은 1918년12월10일 미 상원에, 이승만은 1919년2월25일 윌슨 대통령과 파리평화회의에 동일한 서한을 발송했다.

중국 상해의 한인들은 [신한 청년당]을 결성하고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기로 했다. 김규식은 1919년2월1일 상해를 떠나 3월13일에 파리에 도착했다. 파리에 도착한 김규식은 블라베(Blavet)라는 시인부부의 집에 사무실을 차리고 타이피스트, 통역을 구하여, 1919년4월 [파리위원부]를 설치했다.여기에 선전홍보를 위해 통신국(Bureau d’Information Coréen)을 병설하였다.

파리위원부에는 5월초에 상해에서 온 김탕(金湯), 5월18일 스위스 취리히대학에 재학 중인 이관용(李灌鎔)이 동참했고, 6월3일 제1차 대전에 참전했던 미군지원병 황기환(黃玘煥)이 독일에서 찾아왔다. 또한 6월에는 조소앙, 7월초에는 여운홍이 상해에서 파리에 도착했으며, 이후 연해주에서 국민의회 대표로 윤해와 고창일이 합류했다.    

이들은 김규식을 보좌하며 평화회의 한국대표단을 구성하였다. 한편 김규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과 함께 4월 13일 외무총장 겸 파리평화회의의 대한민국위원 및 [주 파리위원부]의 대표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파리위원부는 바로 이 건물에 입주하여 여러 외교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파리 강화회의가 끝난 뒤 1919년 8월 8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파리위원부] 위원장 김규식은 김탕과 여운홍을 대동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 후 이관용과 황기환이 위원장 직무를 대리하면서 1921년 7월 황기환이 도미할 때까지 재정과 인력이 부족한 가운데서도 《자유한국》 등의 선전책자를 발간하는 한편 여러 국제회의에 참가하면서 독립운동에 진력하였다.

[파리위원부]는 1919년 4월 출범 당시 샤토덩거리 38번지(38, Rue de Chateaudun)에 본부를 두고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는 1920년 중반 이후에는 비엔나 거리 13번지(13, Rue de Vienne)로 이전한 것으로 보인다. 《자유한국》(1920년 8ㆍ9월호 이후)과 『구주의 우리 사업』 발간처 주소는 이곳으로 되어 있는데, 이 지번 일대는 그 동안 재건축이 이루어져 당시건물의 원형은 찾을 수가 없는 실정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파리위원부가 들어 있던 건물은 시내 중심가에 있다. 파리 예술의 전당인 국립오페라극장 북쪽, 성 라자르역 동쪽으로 서너 블록 떨어진 십자로 옆에 자리 잡은 7층 석조 건물이다. 지층 1층과 맨 위에 증축한 7층은 근래 수리하여 원형을 잃었으나, 나머지 6층은 회홍색의 석조로 된 고색창연한 건물로 과거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는 프랑스 보험연합회사가 건물 1층을 사용하고 있었으나, 현재는 잡화를 파는 슈퍼마켓(가게명 : FRANPRIX)이 들어서 있다. 건너편에는 [윌슨 호텔 Wilson Hotel] 자리 잡고 있다. 

= = =

파리평화회의] 이와 연관된 {국제연맹} 대해서 간단히 언급한다.

파리평화회의 (Paris Peace Conference) (Paris Peace Conference, 1919–1920) :   베르사이유평화회의 (Versailles Peace Conference)라고 불리는 [파리평회회의]는  [제1차 세계대전] (World War I, July 28th 1914 - Nov. 11th 1918)의 종결 후의 승리한  연합국(Allied Powers)의 회의로 패배한 중심국(Central Powers)의 평화조약을 설졍했다. 32개국의 국적을 가진 외교관을 포함한 주요한 또는 주요 결정은 [국제연맹] (League of Nations)의 창설과 패배한 국가들의 5개 평화조약이다. 독일과 오토만제국의 해외소유물을 [위임장]()으로 수여한 주로 영국과 프랑스에 수여한다. 독일에 과한 배상, 민족의 경계를 더욱 반영하기 위해서 새로운 국경의 묘획(描劃)(때로는 plebiscites를 수반) 주 결과는 독일과의 [베르사이유조약]으로, 제231조에는 [독일과 그 동맹국의 침략]에 대한 전쟁에 대하는 죄악감을 표시했다.] 이 조항은 독일에 있어서 굴욕적이었으며, 독일이 지불하는 것을 의도한 막대한 배상금을 설정했다 (1931년에 배상이 완료하기 전에 일부만 지불하지 않았다). 주요 5개국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일본 및 미국)이 회의를 지배했다. 그래서 Big Four는 프랑스 수상 조르쥬 클레망소 (Georges Clemenceau), 영국의 수상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David Lloyd George), 미국의 대통령 우드로 윌슨 (Woodrow Wilson) 및 이탈리아 수상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올란도 (Vittorio Emanuele Orlando)이었다. 이들은 비공식적으로 145회 함께 모여서 모든 주요한 결정을 차례 차례로 다른 사람에 의해 비준을 시켰다. 회의는1919년1월18일에 시작했다.

[파리평화회의]에서는 5가지의 주요한 평화조약이 작성되었다. 괄효 안에는영향을 받은 나라 언급)

베르사유 (Versailles) 조약: 1919년6월28일,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방에서, 제1차세계대전후의 국제관계를 확정한 목적으로 31개 연합국과 독일Germany 사이

생제르맹 (Saint-Germain) 조약: 1919년9월10일에 체결된 것으로 목적은 제1차세계대전의 종결과 평화 정착의 목적으로 연합국과 오스트리아Austria간의 조약

뇌이쉬르센 (Neuilly-sur-Seine) 조약: 1919년11월27일 체결한 조약으로 제1차세계대전 전승국과 불가리아 Bulgaria간의 세르보-크로아치아-슬로벤의 독립인정 Bulgaria)

트리아농 (Trianon) 조약: 1920년6월4일 체결한 조약으로 베르사유 궁전 내의 트리아농 궁전에서 제1차세계대전의 전후 문제처리를 목적으로 연합국과 헝가리/Hungary)간의 조약

세브르 (Sevres) 조약: 1920년8월10일에 체결된 것으로 제1차세계대전을 끝내고 평화유지를 목적으로 연합국과 오스만푸릌크/ Ottoman Turkey간의 조약

(이상의 5곳은 파리 근교에 위치하는 소도시들이다.

/ https://en.wikipedia.org/wiki/Paris_Peace_Conference,_1919–1920 (영어)

= =

국제연맹 (League of Nations)은 제1차세계대전 후의 1919년의 협상국과 독일의 베르사유조약, 모든 동맹국 과의 제 강화조약에 의해 규정되어 [베르사유조약의 발효일인 1920년1월10일에 정식으로 발족한 국제기구이다. 연맹으로서 처음 회합은 1920년1월16일에 프랑스 파리서, 제1회 총회는 1920년11월15일에 스위스 즈네브에서 개최되었다. 연맹본부는 1920년부터 1936년까지는 스위스 즈네브의 [Palais Wilson]에서, 1936년부터는 같은 즈네브의 [Palace of Nations]에 설치되어 있었다.

제2차세계대전 중에는 활동정지 상태가 이어졌으나, 1946년4월20일을 기해서 정식으로 해산되었으며, 그의 자산와 역할은 1945년10월24일에 51개국의 본래의 가맹국에 의해서 설립된 [국제연합 / Unites Nations = UN]에 계승되었다

= = =

[독립운동가] 2008년에 보훈처에서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대한민국 정부는 이관용의 유럽과 귀국 후에 독립운동 활동의 공적을 위해 200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하였다. 다음과 같이 그의 [공적 내용]애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 = =

이관용 (1894.7.15 - 1933.8.13, 출생지: 서울)

운동계열: 국내 항일 / 훈격연도: 애국장 (2008)

공적 내용 :  이관용은 1913년 3월 경성전수학교를 졸업한 후 유학 길에 올라 1914년 3월, 영국 옥스퍼드대학 문과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고, 1916년 스위스대학에 입학하였다. 1919년 4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파리위원부 부위원장이 되어 위원장 김규식(金奎植)과 함께 파리에 파견되었다. 7월 17일, 국제사회주의자회의인 루체른 회의에 참석하기를 바라는 서신을 대회 의장에게 발송하였다. 이로써 조소앙과 한국사회당 대표로 참석하여 한국의 현재 상황과 독립의 필요성 등에 대해 설명하고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을 독립국가로 인정할 것을 촉구하는 ‘한국독립승인요구안’을 제출하였다. 8월 9일, 김규식의 뒤를 이어 파리위원부 위원장 대리로 활동하였다. 1920년 1월 대한적십자사 구주지부장으로 스위스의 국제적십자회에 참석하여 일본 적십자사에 대한 항의서를 제출하였으며, 10월 12일 국제연맹옹호회 연합대회에 참석하였다. 1921년 6월 20일 임시정부에서 국무회의를 열어 조국독립을 선전하기 위해 스위스 제네바에 있던 그를 영국과 프랑스에 파견할 것을 결의하기도 하였다. 이관용은 고국을 떠난 지 10년만에 스위스 취리히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1923년 2월 17일 고국으로 돌아왔다. 1923년 5월부터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되어 학생을 가르치는 한편 사회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24년 3월 1일 [소년척후단 조선총연맹발기회](少年斥候團朝鮮總聯盟發起會) 이사로 선임되었으며, 10월경 [조선기근구제회의] 집행위원이 되었다. 1925년 [태평양문제연구회] (太平洋問題硏究會)를 조직하고 종교·경제·이민·외교문제를 연구하며, 하와이 [범태평양회의]에 상주위원을 파견할 것을 협의하였다. 11월 30일, 사회 각 방면에 종사하는 여러 유지가 [조선사정조사연구회]를 조직하자 이에 가입하여 한국의 사회·가정 및 상업·공업·농업·재정과 금융·법제·교육 문제 등을 학술적으로 조사 연구하였다. 1926년 [시대일보] 부사장이 되어 언론운동을 하였다. 1927년 1월 19일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간사로 활동하였다. 12월경, 신간회 경성지회 제2회 정기대회에서 임시집행부 서기장에 선임되었으며, 12월 10일 [재만동포옹호동맹] 집행위원회에서 홍명희(洪命熹)·김기전(金起田)과 함께 성명서 작성위원이 되었다. 1928년 6월 15일 [조선교육협회] 정기총회에서 이사에 선임되었으며 1929년 2월경, [조선일보] 남경특파원으로 파견되어 [북만조선농민개척사](北滿朝鮮農民開拓社)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귀국 후, 1929년 10월 31일 [조선어사전편찬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사건을 전국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신간회 간부들과 동년 12월 13일 민중대회를 개최하고자 결의문 배포 등의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이관용은 1931년 4월 2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1932년 1월 22일 가출옥하였다. 출옥 후 [철학연구회]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33년 8월 13일 함북 청진에서 사망하였다.

= = =

특이한 가문에서 출생  – 이재곤의 3

이관용의 부친 이재곤은 어떤 분인가?       

이재곤 (李載崑 또는 李載崐, 1859년4월8일(음력3월6일) - 1943년7월11일)은   조선말기의 왕족이자 정치인, 대한제국의 황족으로 [정미 7적]의 한 사람이며, 1907년부터 1909년까지 이완용 내각의 학부대신을 지냈다. 독립운동가인 이관용은 그의 셋째 아들이기도 했다. 본관은 전주, 본적은 경성부종로이며, 아호는 동원(東園)이다.

본관은 전주로, 고종과는 같은 항렬의 왕실 종친이다. 흥완군 이정응에게 입적된 완순군 이재완의 친동생이다.[1]

경기도 양주군에서 이신응(李愼應)의 아들로 태어났다 1880년 과거에 급제하여 승정원의 벼슬을 시작으로 홍문관 교리와 지방의 현감 등을 거쳤다.

1896년 비서원경, 1898년 종정원경, 1902년 회계원경 등을 지내며 점차 고위직에 올랐다. 1907년 [한일신협약] 체결 때는 학부대신으로서 공을 세웠고, 일본정부로부터 훈1등 욱일대수장을 서훈 받았다.

이후 [신사회], [대동학회], [대한여자흥학회], [한자통일회], [국민연설회] 등의 각종 친일 단체에서 임원을 맡는 등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하였고, 1909년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 살해되었을 때는 [한자통일회] 지회장으로서 한자통일회] 이등박문추도회를 개최하였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된 뒤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와 은사공채 5만원을 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도 임명되었다. 1912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한일 병합 후에는 불교계와 왕실을 중심으로 꾸준한 친일 활동을 했다. 1915년 조선총독부가 후원하여 조직된 불교 종단인 [삼십본산] 연합사무소 고문을 맡았으며, 1917년에는 [불교옹호회] 고문도 역임했다. 1915년 [다이쇼 천황] 즉위 축하를 위한 행사가 경성신사에서 열렸을 때 참석했고, 1917년 [순종]이 일본 황실 참배를 갈 때 수행했다.

3·1 운동 때 권중현과 함께 작위를 반납할 의사를 표시했으나 일본 정부로부터 거절당한 바 있다. 일제 강점기 동안 광나루에 별장을 갖고 있을 만큼 호화롭게 살았고, 1960년 보도에 따르면 자손들도 서울 중구 세종로에서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 = =

유럽에서 활동항 강점기의 유명 Koreaner로 이한호박사를 소개한다.  :  Rhi Hanho  (이한호) - 스포츠 외교가 (eurasiatour.info) 

= = =

작성자: 송지열 (Ziyul Song) / www.eurasiatour.info

Facebook (Ziyul Song) / www.facebook.com/ziyul.song

Facebook / www.facebook.com/pages/EurasiatourInfo/122944391155017

 .

 

.

©GenevaTourism - 즈네브의 상징인 젝또와 호반에 발달한 아름다운 즈네브의 풍경

.J. J. Rousseau in Switzerland – 스위스의  정치 및 교육 사상가

루소 (Jean Jacques Rousseau)는 정치 및 교육사상가, 철학자, 작가, 작곡가 등 다방면에 큰 영향을 준 유럽의 위대한 인물이다. 그는 1712년6월28일에 오늘날 스위스의 즈네브 (Genève, 영: Geneva)에서 태어났다. 

소년시절과 망명 시절의 일부를 오늘날 스위스에서 보냈다. 18세기 개몽 사상가며, 낭만주의 문학의 선구자이다.. 역사에 남아 있는 명언 중에 하나인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연관으로 자연의 아버지며, 자유의 대변자이다. 2012년은 그의 탄생 300주년의 해로 여러 연고지에서 다양한 행사가 거행된다. 1차로 루소가 활동한 스위스의 서부 지역의 주요 연관 도시들을 11월에 스위스 관광청과 각 지역 관광국의 협조로 5박6일간 다녀왔다. /  www.myswitzerland.com  

Genève (즈네브Geneva) - 국제  유엔도시

즈네브 시와 주는 1815년에 [스위스 연방 공화국]에 가입이 되었다..

즈게브는 레암 호의 남서쪽에 위치하며 주위가 프랑스의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도시의 상징은 레망 호에서 높게 물을 뿜어 올리는 [젯또 / Jet d’Eau] 대분수이다. 인구 19만명을 가진 아담한 도시이지만 세계의 주요기관들이 모여있는 국제도시로 너무나 유명하다. 수준 높은 박물관이 많으며 문화적으로도 항상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도심에서 조금 나가면 론느 강변의 푸른 숲과 스위스 제3의 와인 생산을 자랑하는 포도밭이 펼쳐있다. 16세기부터 시계산업의 중심지이다. / www.geneva-tourism.ch 

1) Espace Rousseau (40 Grand Rue) – 루소 생가, 소 전시관

루소 (J. J. Rousseau)는 1712년6월28일 이 곳에서 태어났다. 이사크 루소 (Issac Rousseau, 1672-1747)와 수산 베르나르트 (Suzanne Bernard, 1673-1712)는 1704년에 결혼을 하였다. 부친 이삭은 즈네브 시민으로 시계 공이며 또한 시 평의회의 의원이었다. 그의 모친은 목사의 딸이었으며 장 자끄의 산후 8일 후에 사망했다.

2층에 소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다. 그의 일생에 관한 주요한 지점들을 언급하고 있으며 약 25분간을Audiovisual (불, 영, 독, 이, 스, 일 및 중어)로 설명을 들으면 돌아 볼 수 있다. 오픈 시간은 매일 (월요일 제외) 11시 – 17시30분, 요금은 어른이 5프랑, 7세 이상 아이, 대학생 등은 3프랑이다. www.espace-rousseau.ch/e/jean-jacques-rousseau.asp 

2) 상트 제르봐 지역 (Quartier de St-Gervais) – 어린 시절 산 곳, 

샹트 제르봐에는 유럽의 시계 제조의 모든 것이 모여 있는 곳으로. 1718년부터 1722년까지 이사크 루소가 여기에 거주했다. 산 곳은 쿠탄스 (Coutance) 거리 28번지의 3층으로 도로에 면하고 있었다. 이사크는 두 아들 프랑스와 및 장 자크 함께 살았다. 이사크의 누이동생 스잔은 1682년 생이었는데 두 생질을 돌보았다. 

     ©SongZy - 루소의 음악작품이 공연된 [Grand Theatre de Geneve]의 장면

3) 루소 박물관 (La Musée Rousseau)

대학 및 시립 도서관 안에 저술한 오리지널 자료가 150점 이상 전시되고 있다. 루소의 저작과 사적에 대해서 루소를 이해하도록 되어 있다. 자서전의 초고, 초판 본, 흉상, 초상화, 소지품 등이 방문자들에게 관람이 된다.

4) 루소  (L’île Jean Jacques Rousseau) – 몽 블랑 다리 근처 론느 강 중

1834년에 조각 상이 루소의 이름이 붙은 섬에 동상이 건립되었다. 프라디에르 (J. Pradier)의 작이다. 루소는 고대 풍에 치장되고 로마 식의 의자에 앉아있다. 모든 모습은 명상적이다. 다리에 원로원 식의 옷을 밑으로 넓히고, 머리는 로마 풍으로 깎았다. 발은 산달 신을 신고 있다.

Bossey (보쎄이) – 프랑스령, 즈네브의 근교 마을

보쎄이는 샬레브 산의 기슭에 있는 프랑스 령이나 즈네브 시의 남쪽으로 가까운 곳에 위치한다. 인구 약 700명을 갖는 작은 마을이다. 루소는 외사촌 형인 아브라함 버나르드 (A. Bernard)와 함께 라베르슈 (J. J. Lambercier, 1676-1738) 목사 집 (사제관)에 기숙했다. 이것은 1724년10월에서 1726년12월까지 2년간 소년시절을 여기서 라틴어의 공부와 긴 시간의 독서를 했다. 루소는 외사촌 형과 함께 공부와 놀이를 한 곳이다. .

Confignon (콩피니옹)– 즈네브 근교의 마을

1728년3월14일 루소는 고향 즈네브를 이별하고 떠났다. 그는 [참회록]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나는 즈네브에서 2km정도 떨어진 사보이 영의 콩피니옹까지 갔다.] 콩피니옹의 사제인 뽕베에르 (Benoit de Pontverre)는 신교에서 전향하는 일에 대해서 힘이 있는 분이다. 그는 루소를 받아 들어서 친절히 접대한 후에 안느시(Annecy)의 열심인 카톨릭 신자 바랑(de Warens) 부인에게 보내졌다. 루소의 방랑 생애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Nyon (니용– 부친 거처지  

즈네브에서 로잔 방향으로 25km 떨어진 호반의 도시로 기차로 12분에 닿는 곳으로 고대 로마의 유적이 남아 있다. 레망 자기박물관과 와인이 시음되는 창고도 있다. 유럽축구연맹 UEFA의 본부 사무국이 소재하는 도시이다.

1722년6월에 장 자끄의 아버지 아삭 루소는 그 때 50세였으며 퇴역한 대위 고팅에 (Pierre Gautier)와 격한 말싸움을 했다. 10월12일에는 재판소에서 투쟁하게 되자 이삭는 출두를 거부했다. 그래서 장 자끄의 교육은 처남 Gabriel Bernard (45세의 재능이 있는 기사)에 맡기고 이삭은 즈네브를 떠나서 도착한 곳이 니옹으로 이 곳은 당시 베른의 영지이었다. 또한 이삭 루소의 40세 되는 여동생 수잔에게 돌보게 했다. 이삭 루소가 살았던 집은 모퉁이에 있었으며 Marche 광장과 Flechere 거리에 면하고 있다. 장 자끄는 여기를 방문만 한 적이 있다. / www.nyon-tourisme.ch/en/index.php

     ©SongZy – [올림픽 수도] 로잔의 우뚝 솟은 웅장한 대성당의 풍경

Lausanne (로잔) – 올림픽의 수도 / www.lausanne-tourisme.ch

1730년에 루소는 로잔에서 음악릏 가르쳤으나 큰 성과가 없었다. 가르쳤던 집은 [5 Rue Pierre Viret]의 현재 작은 목조 건물로, 개인 소유이기에 일반인의 방문이 불가능하다. 가는 방법은 Metro를 이용하여 Bessiéres 역에서 내려 승강기를 타고 오르면 건너편에 대성당이 웅장하게 보이고 큰 다리를 건너면 이 거리가 시작되고 대성당 밑에 5번지가 있다. 밖에서 사진만을 찧을 수 있다.

로잔은 국제 오림픽 본부의 소재지로 여기에 연관된 기관들이 많아서 일명 [올림픽의 수도]라고 부른다. 스위스 연방 대법원이 소재하며 대학교를 위시한 교육기관이 여러 개 있다. 또한 로잔은 현재 보 (Voud) 주의 수도인데 이 주는 1803년에 [스위스 연방]에 가입되었다. / www.lake-geneva-region.ch/en/index.cfm

루소는 로잔에서 뇌샤뗄로 가는 도중 아름다운 라보 [Lavoux]지역과 브베(Vevey)를 지나가게 되었다. 이 포도재배지역은 2007년에 [UNESCO 세계유산지]로 지정이 되었다. 포도밭과 호수 그리고 산들은 그야말로 절경을 이루고 있다.

Yverdon (이베르동– [사이가 좋은 관대한 나의 친구 …]

1762년에 파리에 거주하고 있던 루소에게 체포령이 내려서 그는 망명의 여행을 떠나야 했으며 처음 체류한 곳이 이 이베르동이다. 6월에 루소는 로갱(Daniel Roguin) 소유의 매손 더 콜론 (Maison des Colonnes)에 인접한 작은 탑에 살았다. 이 집은 프래느 거리 (a rue de la plaine) 5번지에 있다. 이 거리는 페스타로찌 광장의 동쪽에 있는데, 이 광장에는 페스타로찌 (Jean-Henri Pestalozzi, 1746-1827)의 동상이 서있다. 루소의 교육사상이 페스타로찌에게 주요한 영향를 주었다. 페스타로찌는 새로운 교육의 발전에 발휘하게 되었다.  그의 주요 활동지 / www.yverdonlesbainsregion.ch/en/yverdonlesbains

Môtiers (모티에르) – 시계와 와인 산지 www.môtiers.ch

이 도시는 그 당시 독일 프로이센의 뇌샤텔 주에 속했다. 작은 곳이나 시계 공장이 있다. 또한 유명한 “거품 와인”를 만드는 “마울러(Mauler cellars)”가 있는데 저장소와 시음 및 판매장을 구비하고 있다. 거품 포도주를 “샴페인” 방식으로 양조하며, 스위스에서 유명한 브란드 포도주 회사로175년의 전통을 갖고 양보다 질에 비중을 두는 회사이다.

1762년7월10일부터 1765년9월8일까지 3년 이상 루소와 떼레즈가 체류하였으며 거주한 한 방은 현재 손질을 잘 하여 [장 자끄 루소 박물관 (Le Musée Jean-Jacques Rousseau)으로 되어 있다. 이 체류는 뇌샤뗄의 왕자 즉 프로이쎈의 프리드리히 2세 (1740-1786)의 비호 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용한 것은 1층 부분과 부엌 그리고 3개의 방이었으며 루소는 햇빛이 드는 방에서 보냈다. 희귀한 여러 전시품이 있는데 쿠아탕 (Maurice Quentin, 1704-1788)이 그린 루소의 초상화를 감상할 수 있다. 이것은 한 폭의 파스텔로 1753년에 루브르 (Louvre)의 그랑 살롱에 전시되었다.

[더 라 투어] 씨는 나를 생생하게 묘사한 유일한 화가이다. 나는 그에 의해서 그린 작은 훌륭한 묘사는 다른 사람이 완벽한 걸작보다 아주 좋아했다.]라고 루소는 표현했다.

     ©SongZy - 뇌샤뗄 호수의 호반에 발달한 아름다운 뇌샤뗄 호반의 풍경

Neuchâtel (뇌샤뗄 – 주의 수도  대학도시

1730년에 루소는 뇌샤뗄에서 음악을 가르친 젹이 있으며 먼 훗날 망명 시절 모띠에 체류할 때 친구들과 교류를 위해 자주 방문했다. 현재 [뇌샤뗄 시립 및 대학 도서관] 내에 루소 자료실 (Salle Rousseau)에는 루소의 친구인 뒤페이루 (Pierre-Alexandre DuPryrou, 1729-1794) 신교 목사와 루소 협회 (L’Association des Amis de J. J. Rousseau)의 공헌으로 서간과 초고들이 많이 정리 보존되어 있다. 또한 루소의 많은 편지, 이것은 다른 어느 곳에 예가 없는 정도의 수이다. 이 중에 800통 이상이 루소의 자필이다. 그리고 [고백]의 최초의 초고, [음악사전]의 초고, [고독한 산보자의 몽상]의 유일한 초고들이 있다. 이 자료실에는 뇌샤텔 시대 (1762-1765)의 루소의 생활과 작품에 대한 것도 전시되고 있다. 이 자료에는 주로 저작, 친구, 문통의 상대, 식물학, 음악 또한 떼레즈에도 언급되고 있다. 상설 전시에는 마타이 (Francois Matthey)에 의해서 기획되어 주석이 붙었다. 

뇌샤뗄 (독: Neuenburg)은 스위스 내의 최대의 호수 뇌샤뗄 호의 북단에 위치하는 동명 주의 수도이다. 이 주는 1815년에 [스위스 연방]에 가입되었다. 이 전에 한 때 독일 프로이센에 속했다. 중세의 모습을 진하게 남기고 있는 도시이며. 또한 대학교가 소재하고 있는 도시이다.

Neuchatel Tourismus / www.neuchatel-tourisme.ch/en/home.html 

St. Peterinsel (샹트 페터  ) – 비엔 (Bienne) 호에 있는 섬

루소는 1765년9월12일에 [모티에]에서 떠나서 샹트 페터 섬 (불어로 생 피에르 섬)의 세금 증수자의 집에 도착했다. 거기에서는 편지들을 쓰는 외에 루소는 [코르시카의 헌법초안]을 상기했다. 산보를 한 후에 루소는 식물의 그림을 그렸다. 이 섬에서 루소는 행복한 시간을 가졌다. 이 작은 낙원의 정막은 루소를 완전히 만족하게 했다. 온화한 기후에도 마음이 들었다. 여기에는 포도와 밤 재배가 가능했다. 고원의 평탄한 언덕과 수목으로 덮인 쥬라 산들을 루소는 잘 조망했다. 거기에는 [고독한 산보자의 꿈]의 일부를 집필했다. 그러나 루소는 1765년10월25일 이곳을 떠나야만 했다. / www.st-petersinsel.ch

[이 2개월간이 나는 가장 행복한 시기로 여긴다. 체재의 전 기간을 통해서 만족하며 어느 순간도 다른 상태를 희망하는 것은 없었다.]라고 J.-J. 루소는 서술했다.

이 세금 증수인의 집은 근래에 수리 되여 현재는 레스토랑 및 호텔로 이용되고 있다. 선착장의 남측에는 동제로 된 루소의 흉상을 볼 수 있다. 이 것은 우동 (Jean Antoine Houdon, 1741-1828)의 작이다. 오리지널은 1838년 이후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섬은 순례지로 유명한 곳으로 괴테 (Goethe), 홀더린(Holderlin), 두마 (Dumas), 발작 (Balzac) 등이 방문했다. 섬운 배만으로 연결이 되며 에어라흐 (Erlach), 비일 (Biel, 불: Bienne) 또는 누베빌 La Neuveville 에서 배가 출발한다. 2012년의 배는 4월6일부터 10월28일까지 운행되며 비일에서 섬까지는 50분이 소요된다. 뇌베빌에는 루소의 이름을 가진 아름다운 호텔이 있다. www.jjrousseau.ch

     ©TourismusBielSeeland - 루소가 4일간 체류한 비일의 저녁 풍경

Biel (비일: Bienne/비엔느) – 시계산업의 중심지

루소는1765년10월10일, 베른 소 의회가 니다우(Nidau) 대관인 폰 그라펜리트(Emmanuel von Graffenried)에 알린 통지에 의하면 이 섬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대관은 상원에 편지를 보내어 루소의 입장을 변호했으나 앞의 결정은 변경되지 않고 26일의 토요일이 최종 기한의 날이 되었다. 전날 금요일, 루소는 비일의 라 크로아 블랑쥬 La Croix Blanche를 통해 방을 빌었다. 그러나 베른 정부는 루소를 더 머물게 할 수 없어서 루소는 비일를 4일 후에 출발하여 베를린에 가려고 했다. 스위스 주재 프랑스 대사의 비서인 바르떼(Antoine Barthes)씨가 여행에 가담했다. 비일에 1765년10월25일부터 4일간 Untergasse 12번지에 있는 개인 집의 “4층의 안쪽에 있는 작고 더러운 방”에 투숙하였다. 이 집은 개인 소유로 개방되지 않으며 다만 집에 [이 집에서 J. J. 루소는 1765년 10월 말에 투숙을 했다]로 표시되어 있다. 비일를 떠나서 바셀 을 거처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로 갔다.

비일 호반의 북쪽에 위치하는 비일/비엔느는 독어 (60%)와 프랑스어(40%)의 2개 국어 병용이 법률로 정해진 도시이다. 링(Ring)이라 불리는 지구를 중심으로 15세기의 교회, 기사의 분수, 여러 색깔의 집들이 나란히 선 구시가에는 중세의 분위기가 아주 잘 남아 있다. 운하로 연결되는 뇌샤뗄호와 무르텐호를 합해서 „3호수 지방“으로 불린다. 비일은 스위스 최대의 시계 그룹인 „스웟치 그룹 (오메가 포함)의 본부와 제조회사가 있는 시계의 멕카이다. www.omega.ch

Tourismus Biel Seeland - www.biel-seeland.ch/en/home.html

= = =

Rousseau in Europe (프랑스 및 유럽의 루소)

장 자끄 루소 (J. J. Rousseua)는 유럽의 위대한 인물이다. 유럽은 지리적으로 크기에 셋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스위스 루소], 둘째 [프랑스 루소], 그리고 셋째는 나머지의 나라들(이탈리아, 영국 및 독일)로 나누어서 볼 수 있다. 

Dijon (디종)부르고뉴주의수도, 유명와인의집산지

RousDijon5

프랑스의 루소 주요 연고지를 방문하였다. 즉 디종 (Dijon), 파리 (Paris), 리용 (Lyon), 샴베리 (Chambery)등을 돌아 보았다. 이 여행의 교통편을 위해서 스위스연방철도(www.sbb.ch), 프랑스국철 (www.sncf.fr)와 유럽철도 (www.raileurope.com) 및 TGV Lyria가 협조하여 주었다. 그리고 디종관관국 (www.visitdijon.com), 리용의 소피텔호텔 (www.sofitel.com/gb/hotel-0553-sofitel-lyon-bellecour/index.shtml), 샴베리 관광안내소 (www.chambery-tourisme.com) 등이 협조해 주었다.

프랑스 루소의 주요 연고지에 대한 정보를 [프랑스관광청]의 자료도 일부 참고 했다. / www.franceguide.com

루소는이곳의과학아카데미에 1750년에현상논문에 1등으로당선되면서하루밤사이에아주유명하게되었으며이로인해저술가로서의재능이인정되여후에여러대서들을저술하게된다. 시상을한건물은현재개인소유로방문이불가하며건물벽에기념판이설치되어있다. 이것은 1912년에그의 200주년탄생을기념해서만들었다고한다. 이건물에서가까운곳에 [루소의거리 / Rue de J.-J. Rousseau]가있다./ www.acascia-dijon.fr(불어)

디종은프랑스중동부에위치하며부르고뉴(Bourgogne) 공국시대의수도로 12세기부터수륙교통과상공업의중심지로번영을누렸던곳이다. 한때공국의확장으로부유하게되었으며공작의권한이프랑스왕을능가한적이있었다고한다. 옛날의화려했던명성과부귀영화가다소바래긴했지만지금에도남아있는뛰어난문화유산이많이있다. www.musees-bourgogne.org

디종은인구약 16만명으로아담한중도시며파리에서 300km, 바셀에서 250km, 제네바에서 200km, 리용에서 200km로교통의중심지이다. 포도주의본산지로유명하다. [와인축제]는 8월말 - 9월초에디종의여러곳에서개최되며다양한볼거리도제공한다. 또한디종에는맛있는특식들이많이개발되여미식가들에게인기가크다.디종은프랑스최대의겨자생산지로다양한맛을즐길수있다 (www.maille.com). 또한거리는특식제품으로미식가들을즐기게하는전통있는특식점들이있다(www.bourgognestreet.fr). 11월초에[국제미식박람회]가개최된다.

디종은관광안내소 (Tourist Office)가디종본역청사바로옆에있어서편리하게정보를얻을수있다.

시내관광을편리하게경제적으로유리하게하는시스템[Pass Dijon ]이운영되고있다. 이패스소지자는대중교통수단무료이용이가능하며, 30여곳이넘는유적지무료입장, 60여곳의상점 (관광기념품점, 레스토랑, 부띠끄등)에서할인혜택을받는다. 24시간, 48시간, 72시간유효한패스가있으며 24시간용은어른이 18유로이다. www.visitdijon.com/de/dijon-visite-pass_dijon_cote_de_nuits.htm

- 부르고뉴공국궁전 (Palais des Ducs de Bourgogne): 14세기부르고뉴공국시절의궁전으로현재건물의서편은시청사로동편은미술관 (Musée des Beaux-Arts)사용되고있다. 미술관은프랑스2미술관이라불릴정도로소장품이대단하고프랑스에서가장오래된미술관중에하나이기도하다. /  www.dijon.fr/english-version!0-262 

Dijon Tourist Office - www.dijon-tourism.com

= = =

Lyon (리용) – 프랑스 제2의 도시, 견직물 도시

RousLyon2     ©SongZy – (Rhone) 강변에발달한리용 (Lyon)멋진모습

루소는도시에여러체류하였는데주요한것은다음의번이다. 번째는 17304월에음악가메스토르 (Le Malstre)함께것이다. 번째는 17405월에리용, 포레 (Forez)보죠레 (Beaujolais)지사보노마블리 (Jean Bonnot de Mably) 집의가정교사로부임한때이다.

루소는마블리씨의아이샹트마리(Sainte-Marie)콩딜라크(Condillac)교육에임무를졌다.

혜택받은도시여, 그는프랑스의장식이며, 우주의보배며, 풍요한샘들. 리용아! 매력있는푸르트스의아이들그녀의조용한속에서일체의예술을맞이한다.“ J. J. 루소의보르도서간 (1741-1742)에서

그리고후에 17686월과 17705월에스위스은행가의과부인 [Boyde la Tour] 부인의 Rochecardon성으로초대된일이있다. 후에 1771년에서 1775사이 8서신연락이있었다.

리용시청에서는 1770419일에그의작품 [Pygmalion]초연을하도록싸인을하고공개한것이다.

리용은 (Rhône) 강과 (Saône) 강의양안에발달한도시로인구 45명을가진프랑스에서는번째로도시이다. 프랑스금융센터의하나이며많은은행의본점들이이곳에있다. 시는고대에서물자의집산지로번영하였으며중세는유럽에서유수의교역지로서번성하였고견직물의산지로알려져있다. 또한시가지는 UNESCO세계문화유산에등록되어있다. 미술관 (Musee des Braux-Arts)방문할가치가있다.리용의시립도서관에서번갈아전시회개최되고있다. / www.bm-lyon.fr

RhoneAlpes]지역의행정의수도이다. / www.rhonealpes-tourisme.com/ www.rousseau2012.rhonealpes.fr

Lyon City Card: 관광객에게 편리한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다.

Lyon Tourist Office / www.en.lyon-france.com

= = =

Chambéry (샹베리)사보이주의수도로아주오래된도시.

RousChamb5     ©SongZy – 사보와국의 거성, 현재 지방의회 회의실로 이용 모습

샹베리는프랑스동부론알프 (RhoneAlpes)주에속한도시로사보아공국의수도였다. 인구 6 (인접도시들을합하면 11)갖는아름다운고도이며겨울스포츠의중심지이다. 사보이공국의궁성 (Le Chateau des Ducs de Savoie)중세와현대의건축양식으로구성되어있으며오늘지방의회의회의실로이용하고있다. 건물옆에 1993년에마련된 70들은프랑스에서는제일크고세계에서 8번째콘서트용이다. 첫째와셋째토요일저녁 530분에콘서트가개최된다.곳에있는거성에선루이 14세가사보이공주와함께결혼식을곳으로도유명하다

루소는1731년10월부터 다음해 6월까지 8개월간 샹베리 사브와 왕국의 지적 조사과에서 근무했다. 이 후에 음악교사가 되고 음악과 식물학에 대해서 더 공부를 하고 휴양도 하였다. 이 곳에서 바랑부인의보호하에샴베리(Chambery) 시내에거주하였으며근교의정원샤르메트(Charmettes)에서1736년부터여름에만와서이용하였. 루소는 1740년 리용으로 옮기기까지 10년간 이곳에서 살았는데 그의 생애에 가장 오래 체류한 곳이다.

샹베리에서는 7월과 8월에 [안내자조합]주최로당시의복장을행사가거행된다. 장소는보행자천국, 샹베리의시가돌담에서개최된다. ( 9시에 Place du Château에서시작한다.)

예약은[샹베리관광안내소]한다. 전화: (79)33 42 47.

[알기위하여 „Pour mieux connaître“] 라는협회가오래전부터샹베리를발견하는데도움을주고있다.

공원 [Clos Savoiroux]에는젊은시절을회상하는젊은루소의아름다운동상이있다

= = =

Les Charmettes 루소의 (Maison de J.-J. Rousseau)

RousChamb9       ©SongZy – 루소가 1736이후 여름에만 이용한 정원과 집 (박물관)

루소가바랑부인과함께1736년부터여름에만와서이용한집이다. 지금박물관으로이용되고있다. 18세기의생활분위기를보여주고있다. 작은정원이있으며당시루소의식물학에대한정열을수도있다. 집은프랑스혁명이후순례지로많은사람들이찾아들었다고한다.

최근에는산책용의작은길이샤르메뜨의뜰과연락이되도록했다. 루소집에서도시까지작은길을통해서 [자연의연구]몰두있다. 작은과수원에는과일, 약초, 포도가재배되고있다.

행복한공간은거기에있다. 더러운것을모르는낙원에이르는같다.“ 루소가집에서생애에서가장아름다운시기를보낸이유를알게된다. 이곳에가는방법은공화국거리 (Rue de la Republique)통해서있으며, 표식이있다.http://musees.chambery.fr

금년은탄생 300주년을기념해서많은다양한행사들이거행된다. 프로그램이마련되어있는데불어만으로되어있다. /: www.chambery.fr/rousseau2012

Chambery 카드: 카드요금은 1 유로인데 51일부터 1030일까지유효하며투어, 박물관, 여러가지에할인혹은무료로이용이된다.

Office de Tourisme Chambéry, 5 bis Place du Palais de Justice, 73000 Chambery  / www.chambery-tourisme.com

Open: 9시부터 1230 /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 = =

Paris (파리) – 프랑스의 수도, 루소의 묘가 있는 도시

Rousparis       ©SongZy – 파리를상징하는에펠탑과아름다운세느강의모습

파리는프랑스의수도며당시에문화와예술의중심지로많은유명인사들이이곳으로모여와서활동했다. 오늘파리는거주자들과관광객으로그야말로 [메가폴리스]도시이다. 도시를개인적으로방문을경우사전의정보와요령으로시간, 수고경비를줄일있다. 기차로파리에도착할경우파리관광국의사무소에서참고자료와교통편내지 [Paris Pass]쉽게구입할있다. 안내소가있는역은파리리용 (Gare de Lyon), 파리 (Gare du Nord), 파리 (Gare de l’Est)있다. 여기서한글로지도를입수한다. 공공교통편 (지하철과PER, 버스전차 T1, T2, T3)이용할경우 [파리방문카드 (Paris Visite)]구입하면된다. 1 – 5일간사용구역을위해시내 1-3구역와 1-6구역유효한것을구입할있다. 교통편에추가한서비스박물관입장과다른혜택을받기위한 [Paris Pass]제도가있다. www.parisinfo.com(한글도가능) / www.parispass.com

지하철 (Metro) 역에서지하철, 버스PER (근교)위한 [Lecture confort]입수하면편리하다.

루소의파리방문은여러차례이다. 1방문은프랑스의대사보나끄 (von Bonac)후작과그의부인주선으로1731년에고다르대령의조카가정교사로일시일했다. 오래있지않고파리를떠나서리용을거처바랑부인이있는샹베리로갔다.

2방문은리용의가정교사일을그만두고1741년에번째파리로가서복사와음악교사로일하다.

3방문은베니스주재프랑스대사관의대사비서직을그만두고17448월에돌아온것이번째이다. 4방문은즈네브에서 4개월머문후에175410월에다시파리로돌아왔다. 다섯번째로

1770724일에서루소는떼레즈와함께[rue Platriere] 거리에살았다. 머문호텔은-에스프리(St-Esprit), 포스테(Postes), 부리용(Bullion) 등이다. 루소는악보를베끼고, 친구들을맞이하고, 오페라하우스에발을옮기고, 식물표본을정리하고, 식물학에대한편지를기초하고, [루소의대화, 자끄를재판하다] [고독한산책자의]집필했다..

= =

Le Panthéon (빵떼옹)프랑스의위대한인물들이안장된묘소

507기독교로개종한것을위해서대성당으로건축했다. 프랑스혁명후인 1791년에 [국가의신전]으로개조했다. 웅장한건물이며들어가면 4면에벽화들이있고앞쪽과중앙에조각품들이장식되어있다. 앞쪽의 2계층을내려가면 [지하납골당]있다. 납골당입구에계몽주의를대표하는철학자볼떼 (Voltaire)루소 (Rousseau)묘가있다.

1794414일에, 국민공회에서루소의유해를유명한지하묘소인빵떼옹에옮기는발령을내렸다. 자끄캄바세레 (Jean-Jacques de Cambacérès, 1755-1824)국민공회의장으로유명한연설을했다. 이것은사람들의노래가되었다.„오오루소, 현자의표본인사람, 인류의은인이요, 아주자랑스런자유의국민에서송가를받으오, 안에서평등을지급해요!“

주소: Place du Pantheon, 75005 Paris (가는방법은지하철: Cardinal-Lemoine, Maubert-Mutualite, Jussieu / 버스: Luxembourg

웹사이트 [www.monuments-nationaux.fr/en]방문하여 위에 표시된 [monuments]눌려서 오른편의 [Paris] [Pantheon]찾으면 된다. 2012629일부터 930일까지특별전시회가개최됨을알려준다. 개관시간: 41-930: 9.30-18.30 / 101-331: 10-1730

Paris Tourism Office / www.paris.com

= = =

III. Rousseau in other European Countries

스위스와 프랑스를 제외한 유럽의 루소 연고지를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A) Italy (이탈리아)  

Torino (토리노 / : 투린/Turin) – 이탈리아 북서부의 도시 

Turino1    (c)WikipediaPic. - 북부  이탈리아의 산업도시 [Torino]의 아름다운 야경

스피리토상토(Spirito Santo) 의세례지원자의시설은 1661년에설립되어, 스피리토샹토의교회신자회의손에서유지되었다. 루소는이시설에서침식의도움을받고허락된기간에카톨릭에귀화된후, 4월23일에카톨릭세례를받았다. 프로테스단트교포기선언에이어서 1728년7월부터 12월까지는마드레느더베르세리백작부인하에, 1729년2월15일부터 8월30일까지는쿠봉백작밑에서 [사용인]으로지나게되었다.

루소는이지방의바클이란이름의소년과알게되었다.그와함께토리노를떠났다. 봐랑스부인과재회하려고결정한것이다. / www.turismotorino.org/en 

= =

Venezia (베네치아, : Venice) – 특이한 수상도시

1743년9월5일에루소는팔레토마키리 (Palais Toma Quirini)에도착했다. 루소는프랑스대사인몽따규 (Pierre-Francois Montaigu) 백작의서기로임명되여온것이다. 루소는백작의편지를쓰든가해서조정의재능을단련했다. 또한이탈리아음악에대해서정열을깊게한것도이때의일이다. 루소가감동한것은 [노래의매력적인맛, 음성의아름다움, 연주의정확성으로, 그것은바로낙원에있는것같은기분이겠죠!]

그러나루소는백작과사이가좋지않아져서. 생각없이 1744년8월6일베니스를떠나서파리로돌아왔다. www.comune.venezia.it/flex/cm/pages/ServeBLOB.php/L/EN/IDPagina/117

= = =

B) England (영국

Chiswick (치스위크) – 런던의 서쪽에 있는 마을 

루소는 영국의 철학자훔 (David Hume, 1711-1776)의 초청으로 영국 런던을 방문하여 1월부터 3월까지 [치스위크]에지냈다. 거기 태임스 (Thames) 강에 면한 마을의Pullein 식료품점에 기거했다. 치스위크의 도서관에는 루소가 여기서 지낸 관계자료가 정리 되어 있다. www.chiswickhistory.org.uk

런던의화가람사이 (Allan Ramsay, 1709-1784)에서루소는초상화를그려서받은것이알려져있다. 이그림의사본은스위스니옹 (Nyon)의근처코페 (Coppet)의성에있다.

.

WottonHall (우우톤) – 영국의중부에위치하는건물

3월22일, 루소는뗄레즈와함께[우우톤홀]에도착했다. 이곳은런던에서 267km 떨어진스타포트 (Stafford) 주에있는데벤포르트(Davenport) 영지내에있었다. 루소는봄이되자이지방의풍부한식물을체계적으로조사하기시작했다. 아주조용한곳으로루소는최후를맞이하려고생각했다. 그러나그를보호한훔과불화를갖자1767년5월말에영국을떠나서다시프랑스로돌아왔다.

www.infed.org/walking/wa-rousseau.htm

= = =

C) Germany (독일)  

Dessau-Wörlitz (데싸우-뵈를리츠) – UNESCO 세계문화유산지

루소는프로이쎈왕의손님으로뇌샤텔영지에체재한것이있었으나현재의독일에발을들어넣은일은없다. 그럼에도[루소의섬]을데싸우(Dessau)의뵈르리츠 (Wörlitz)에서볼수있다. 이것은 1778년에르므농빌에만들어진루소의최초의묘를꼭담게만들었다. 안할트-데싸우 (Anhalt-Dessau)의황태자 (1740-1817)는이철인루소를칭송해서 18세기말엽정원과건물을정비했다. 목적은박애주의의명으로알려진문화적교육학적개혁의문제를실현하기때문이었다. / www.woerlitz-information.de

= = =

생 애

1712  6월28일 즈네브(Genève)에서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나다. 7월7일에 산후증으로 모친이 사망하다.  고모 Suzon이 돌봤다

1718  St. Gervais 지구의 Coutance 거리로 이사하다.

1719  7살때부터 아버지와 함께 소설과 역사의 책들을 읽었으며, 사상의 기초를 구축함.

1722  아버지는 퇴역 군인과의 싸움으로 즈네브를 떠나 니용(Nyon)으로 이주했다. 10월 외사촌동생 아브라함과 보세(Bossey)에 있는 랑베르시에 (Lambercier) 목사 밑에서 수업을 받았다.

1725  4월에시계 조각사 뒤꼬망(Ducommun) 집에 5년계약으로 견습공으로 들어가다.

1726  아버지 이삭 루소는 니용에서 재혼하다.

1728  16살에 견습공 생활 청산하고. 방랑생활에 들어가기로 결심하다..

3월21일에 즈네브를 떠나서 꽁피뇽(Confignon)를 거처 안느시(Annecy)에 있는 바랑 (de Warens) 부인을 만나기 위해 가다. 그녀의 주선으로 사보아 주의 수도 또리노(Torino)에 갔으며 구교로 개종하기 위한 기관을 방문하다. 여기서 귀족들의 시동이 되다.

1730 바랑부인을 찾기위해 안느시로 돌아와서 니용을 거처 프리부르(Fribourg) 방문후에 로잔(Lausanne)과 뇌샤뗄 (Neuchâtel)에서 음악을 가르치다. 베른(Berne, 독: Bern)과 솔뢰르 (Soleure, 독: Solothurn/졸로투른)을 방문하다. 프랑스 대사 보냐끄 (Bonac)후작부부의 주선으로 처음으로 파리로 가서. 스위스대령코따르 집에서 일하다.

1731  파리에서 실망한 후에 이곳을 떠나서 바랑부인이 있는 샹베리(Chembéry)와서 지적조사원으로 8개월 일한 후에 그만두고 음악을 가르치다. 바랑백작 부인비호하에서 교육을 받았고 그녀는 모친같은 여자친구가 되었다. (루소는 이시기에 대해서 생애에 가장 행복한 시기로 회상했다)

1735  루소는 건강 회복을 위해서 샹베리 근교 샤메뜨 (Les Charmettes) 전원집에서 거주하기 시작했다.

1737 병진찰을 받기위해 남부 프랑스의 몽피에르(Montpellier)를 다녀 왔다. 

1740  바란부인과 이별하고, 리용의 마블리(Mably) 가의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가다.

1742  음악의 새로운 기보법을 발표했으며 이것을 기회로 파리로가다. 디더로(Diderot)와 친교. 이후에 한동안 [백과전서]에 원고를 집필.

1743  프랑스 대사의 비서로 베니스(Venice)에 가다.

1744  대사와의 불화로 비서직을 그만두고 다시 파리로 돌아오다.

1745  가정부 떼레스(Thérèse Levasseur)와 동거 5명의 자녀들을 난 후에 다 고아원에 보내다.

1747  5월9일에 오랫 동안 보지 못했던 아버지가 니용에서 사망하다.

1750  디종(Dijon) 아카데미의 현상논문 [학문과예술]에 1등으로 당선되여 일약 유명해졌으며 파리에서 백과사전파의 지식인들과 교제했다. 이 후에 의욕적인 저작과 음악 작품을 창작하다.

1752  [마을의점쟁이]이란 오페라공연의 성공으로 퐁뗀느볼로(Fontaingleau) 궁정극장에서 국왕 앞에서 공연하여 대 성공하다. 루이 15세의 알현을 받았으나 거절하다.

1753  작품 저술에 진력하다.

1754  즈네브에 돌아와서 카톨릭교회와 결연하였으며 이때의 고향방문 그리고 바랑부인의 만남도 마지막이 되었다. .

1755  인간평등기원론 (Discours sur l’origine de l’inegalite parmi les homes)란 정치 경제론을 출판하다. 문인으로 지위를 확립했다. 그러나 국왕의 연금수여를 단절하고 파리를 떠났다.

1756  데피네 (d’Epinay) 부인의 초대로 에므농빌(Emmenonville)의 은자암 (Hermitage)으로 옮기다. 

1758  파리에 다시 돌아와서 근교 몽모랑시 (Montmorency)의 몽루이 (Montlouis)로옮겨 집필하다.

1759  뤽상부르 (Luxembourg) 공작 부부와 친교하다.

1761  시골에서 쓰기 시작한 연애소설 [Julie 혹은 신에로이즈 Héloise]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또한 사회계약론 (Contral Social)를 집필 했다.

1762  이해 초에 [사회계약론]과 교육론 [에밀/Emil]이 간행되자 그 4권에 있는 [사보아인 사제의 신앙고백]이 갖는 자연종교적 내용이 파리대학 신학부에서 단죄되여 [에밀]은 금서로 지정되고 루소 자신에 대해서 체포장이 내리게되자 스위스로 망명했다. 익명으로 스위스의 이베르동(Yverdon, 6월19일-7월10일)을 거처 모띠에르 (Môtiers/NE)에 가서 1762년7월10일부터 1765년9월12일까지 거주했다.

1763  즈네브 시민권을 박탈당했다. 

1765  페터(St. Peter)에 1765년9월12일에갔으나오래있지못하고 10월25일에또떠나야만했다. 원래는비일(Biel)과바셀(Basel)를거처독일로가려고했으나변경되어스트라스부그 (Strassbourg)를거처비밀리에 12월16일에파리에도착했으며이어서영국으로향했다.

1966  1월13일런던에도착, 3월19일이후.우우톤 ( Wootten)에서 [참회록] 저술을시작하다.

1767  그를보호한영국의철학자훔(David Hume)과불화를갖자5월말에영국을떠나서다시프랑스로돌아와서꽁띠 (Conti) 왕자의후원으로6월21일부터트리이(Trye)의성에살았다.

1768  트리이를떠나서리용, 그르노블(Grenoble), 샹베리, 부르고앙(Bourgion (8월30일떼레즈와정식으로결혼식가짐) 등을여행하다. 참회록을거의완성했다.

1770  부르고앙의몬칸 ()을떠나리용을거처가명으로파리로다시돌아가다.

1771  그의추적생활에서탈피하기위해서그의자서전 [고백 Confessions]을계속썼다. (출판은사후에공개되었다).

1772  [루소는 장자끄를 심판한다]를 쓰기 시작하다.

1776  [고독한 산책자의 꿈]을 쓰기시작하였으나 미완성 중에

1778  7월2일 파리의 근교 에르므농빌 (Ermenonville) 사망하다.

1782  자서전 [고백 Confessions]의 초판이 출간되다.

1794  프랑스혁명후에 그의 유해는 유명한 인사들이 안장되어 있는 판테온(Panthéon)으로 이장하다. 

= = =

저 작

▪ 과학과 예술에 대한 논문/설 (Discours sur les sciences et les arts), 1750

▪ 인간불평등 기원론 (Discours sur l’orgine et les fondements de l’inegalite parmi les hommes), 1755

▪ 언어 기원론 (Essais ur l’orgine des langues), 비간행

▪ 쥬리 혹은 신 에로이즈 (Julie ou la nouvelle Heloise), 1761

▪ 사회계약론 (Du Contrat Social), 1762

▪ 에밀 혹은 교육에 대해서 (Emil ou de l’education), 1762

▪ 고백록/ 참회록 (Les Confessions), 1766년경집필

▪ 고독한 산보자의 꿈 (Reveries du promeneur solitaire)

▪ 백과사전 (l’ Encyclopedie)

= =

자료 출처 (일부) - Wikipedia의 정보 등

= = = 

작성자: 송지열 (Ziyul Song) / www.eurasiatour.info / This email address is being protected from spambots. You need JavaScript enabled to view it.  

Facebook (Ziyul Song) / www.facebook.com/ziyul.song  

Facebook  / www.facebook.com/pages/EurasiatourInfo/122944391155017

.

.

Andermatt1

   (c)Song, Ziyul  -  [Gotthard] 지역의 중심지 Andermatt의 호텔과 설경의 풍경 

.

Goethes Reisen in die Schweiz 

1 여행 - 교양여행 : 1775514일부터 722일까지

괴테의 1차 스위스 여행은 1775년 5월 14일에 Hainbund의 시인들 즉 슈톨베르크 형제 (Christian und Friedrich Leopold zu Stolberg)와 함께 Darmstadt, Mannheim (5월14일 투숙), Heidelberg와 Karlsruhe (5월17일 체류)를 거치면서 시작된다. Karlsruhe에서 괴테는 Karl Friedrich von Baden 변경방백(邊境 方伯, 공작에 해당) 집에서 두 번째 (첫 번째는 1774년12월11일 프랑크푸르트에서)로 작센-봐이마르의 칼 아우구스트와 그의 갇 결혼한 부인 Hessen-Darmstadt의 Louise를 만났다. 괴테는 5월24일 – 26일를 Strassburg에 체류하였으며, 5월27일부터 6월5일까지는 그의 누이동생 Cornelia가 있는 Emmendingen을 방문했다. 6월6 - 8일사이 괴테는 Freiburg, Schaffhausen, Konstanz와 Winterthur를 거처서 Zuerich에 도착해서 친구 라봐터 (Lavater) 집에 6월9일 - 15일까지 유숙했다.    

그는 Zuerich서부터 Einsiedeln, Schwyz, Rigi 산, Vierwaldstaetter 호수, Goeschenen, Andermatt 그리고 Sant Gotthard까지 혼자서 여행을 했다. 여기서 그의 스케치 [Scheideblick nach Italien]를 그렸다. 6월26일에 괴테는 다시 Zuerich에 돌아왔다.

7월6일 이후 그는 Basel, Strassburg (7월12일 숙박), Speyer, Heidelberg (7월20일 숙박)와 Darmstadt (여기서 Merck와 Herder를 만남)를 거처서 7월22일에 Frankfurt에 돌아왔다.

= = =

.

      (c)Zurich Tourism - 아름다운 취리히 호수의 풍경

.

2 여행 - 업무여행 : 1779923일부터 1225일까지

우선 괴테는 Weimar에서 Karl August 공작과 폰 벤델 (Otto Joachim Moritz von Wendel, 1752-1794) 산림 감독관과 함께 Kassel (여기서 Georg Forster와 만남)를 거처서 9월12일에 Frankfurt에 도착하다.

여기서 9월23일에 수행원들과 여행에 올랐다. 여행은 Heidelberg에서 Sesenheim (9월25일에 Brion 가족을 방문함), Strassburg (9월26일에 Lili von Tuerkheim-Schoenemann을 방문)를 거처서 그의 누이 동생의 묘가 있는 Emmendingen (9월27/28일 숙박)을 방문했다.

스위스에는 먼저 Thun (10월8일), Lauterbrunnen, Staubbach (10월9일에 폭포 Staubbachfall를 소재로 ‚Gesang der Geister ueber den Wassern‘를 씀) 거처서 Grindelwald (10월11일 숙박)까지 갔으며, 여기서 다시 Thun으로 돌아와서 1박 (10월14일)을 했다. 이어서 Bern (10월15–19일)과 Lausanne (10월20-23일까지 투숙)을 거처서 즈네브 (Geneve)까지 여행했다. 여기서 그는 10월27일부터 11월2일까지 체류했다.  이 후에 샤모니 (Chamonix, 현 프랑스 령) (11울3-6일간), St. Gotthard (11월12-14일)와 루체른 (Luzern, 11월16일)를 거처서 Zuerich에 도착했다. 11월18일부터 12월2일까지 괴테는 다시 Lavater 목사의 댁에 체류했다. 돌아 오는 길에 Winterthur, Konstanz, Schaffhausen (12월2-8일까지) 투숙했다.

Stuttgart (12월11-18일간 숙박, [쉴러]가 학생이었든 학교 방문함), Karlsruhe (12월20일), Mannheim (12월21-23일 체류, Iffland가 Carlos의 역을 한 Clavigo의 상연을 봄)을 거쳤으며, 12월25일에 Frankfurt에 돌아 왔다.           

= = =

.

      (c)Song Ziyul - 유럽 최대 수량을 갖는 [스위스 라인폭포]의 장관

.

3 여행 - 업무여행 : 1797920일부터 1120일까지

괴테는 그의 3차 스위스 여행을 7월30일 Weimar에서 시작해서 먼저 Fulda를 거처서 Frankfurt로 갔다. 거기서 그는 그의 모친을 마지막으로 만났다. 8월25일에 계속해서 Darmstadt, Heidelberg, Heilbronn와 Ludwigsburg를 지나서 Stuttgart에 왔다 (8월29일-9월7일). 여기서 그는 건축사인 투레 (Nikolaus Freidrich Thouret (1767-1845, 1798년에 궁성 건축가로 Weimar에 초청이 되었음)를 방문했다. 괴테는 9월7일부터 16일까지 Tuebingen에 있는 출판가인 Gotha댁에 손님으로 체류했다.

9월20일에 그는 Schaffhausen (라인 폭포 소재지)을 거처 Zuerich에 도착하였으며, 미술사에 전문가이며, 화가인 Heinrich Mayer 댁에 합류했다.  그들은 Staefa를 거처서 배로서 Richterswil과 Einsiedeln (9월28일)에 도착하였으며, 10월3일에는 괴테의 3번째로 오르게 되는 St. Gootthard에 왔다. 돌아오는

길에서 Altdorf와 Kuessnacht를 지나서 다시 슈태파 (Staefa (10월8일)에 왔다, 10월21일에 Staefa  에서 Herrliberg에 그리고 Zuerich에 와서 10월22일 - 26일간 체류했다.

독일을 돌아와서 거친 여행 코스는 Tuttlingen, Tuebingen, Echterding, Stuttgart, Gmuend, Ellwangen, Dinkelsbuehl, Schwalbach 지나서 Nuernberg에 왔다. 여기서 11월6일부터 15일까지 Knebel 댁에 체류했다. Meyer씨와 감께 Erlangen, Bamberg, Kronach와 Jena를 거처서 11월20일에Weimar로 다시 돌아왔다.  

= =

Goethe 독일 여행 (1) / www.eurasiatour.info/index.php/en/germany/other/172

Goethe 독일 여행 (2) / www.eurasiatour.info/index.php/en/germany/other/142

Goethe 하르츠 여행 / www.eurasiatour.info/index.php/en/germany/other/185

Goethe 프랑스 여행 / www.eurasiatour.info/index.php/en/europe/other/232

Goethe 이탈리아여행 / www.eurasiatour.info/index.php/en/europe/381

Goethe 체코/온천여행 / www.eurasiatour.info/index.php/en/europe/259

Goethe 폴란드 여행 /  www.eurasiatour.info/index.php/en/europe/other/176 

= = =                                                            

작성자: 송지열 (Song, Ziyul) / www.eurasiatour.info

- 

.Luzern (루체른, : Lucerne)중앙스위스

LuzernPanor7   ©LuzernTourismus - [루체른 역]을 중심한 호수와 산의 아름다운 파노라마  

루체른은 독어권 스위스의 중앙에 위치하는 오래 전부터 스위스를 대표하는 관광명소 중에 하나이다. 호수에서 유유히 흐르는 로이스 (Reuss) 강의 양쪽 연안에 도시가 발달해 나갔으며 지붕이 있는 목조 다리 [카펠교/ Kapellbruecke]중심으로 4개의 다리가 세워져 있다. 아름다운 호수와 그를 둘려싼 알프스의 산맥의 산들이 그리고 중세의 건물들이 어울린 풍경은 방문자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루체른에는 규모가 크며 유명한 교통박물관이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연주가들이 집결한 국제음악제와 많은 이벤트들이 개최 되는 문화도시이다. / www.Luzern.com 

또한 아름다운 호수를 유람선 관광으로 즐길 있는 다양한 코스가 있다. / www.lakelucerne.ch/en.html 

교통편 (Transportation)

곳에오는철도편은취리히공항에서루체른중앙역까지가라타지않고직접가는데시간에 2번의기차편이있어서매우편리하다. /  www.swisstravelsystem.com  

호텔 및 식당 (Hotels & Restaurant) 

숙소로 루체른 역에서 왼편 가까운 편리한 중고급호텔 예를 들면 Hotel Continental Park, Monopol, Waldstaetterhof 등 여러 것이 있으며, 다리 건너 호반에는 특급 호텔 들 (Palace, Schweizerhof , Grand Hotel National)이 있다.

루체른에는전통요리와국제요리를전문으로하는다양한레스토랑들이있다.

한국식당으로시설이것을소개한다. Restaurant Korea Town (Hirschmattstrasse 23, 6003 Luzern, 전화: +41 41 210 11. 77)  www.koreatown.ch 

중앙역에서 왼편으로 걸어서 10분 내에 도달할 수 있다. 그리고 점심식사 때는 가격이 유리한 뷰페 식이 마련되여 있어 이용에 편리하다. 

= = = = =

Central Switzerland (중앙스위스) 

루체른(Luzern) 주위에는 필라투스(Pilatus), 리기(Rigi), 티트리스(Titlis) 등 유명한 산들이 가까이 있어 여름과 겨울의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편리한 여건을 가진 도시이다. 예로서 전장 500 km의 스키 및 스노우보드 활주로를 가진 20곳의 겨울스포츠 센터를 중심으로 새로 만든 겨울관광의 매력지 몇 곳을 알린다.

1) Pilatus (필라투스) 산 - 루체른의 상징

      © Luzern Tourismus AG -루체른의상징인필라투스산과올라가는교통수단

특이한 이름을 가진 필라투스 산 (해발 2’132m)은 웅장한 다양한 전망을 갖고 있으며 쉽게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다. 즉 정상에서는 웅장한 만년설의 알프스 장관을 즐길 수 있으며, 반대편에는. 날씨가 선명할 때는 독일의 흑림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잘 설치된 시설에서 산책과 사진 촬영 그리고 식사와 쇼핑을 할 수 있다. 정상에 올라 가는 방법이 2가지가 있다.

한 방법은 루체른의 근교 크리엔스(Kriens) 마을에서 잘 설치된 캐이블 카로 올라 갈 수 있다. 이곳에 오는 방법은 [루체른 중앙역] 좌편의  버스 정유소에서  도로리 버스 1번으로 [Zentrum Pilatus, 약 15분 소요]에 하차, 여기서 [Pilatus Station] 표시에 따라서 승강장까지 걸어 5분정도 걸린다. 먼저 4인용 캐이블 카로 올라가는데 약 20분간 푸른 초원과 숲 그리고 마을과 도시의 아름다운 풍경을 즐기면서 [Fraekmuentegg, 1’416m] 정유장까지 올라간다. 여기서 하차해서 큰 대형 캐이블 카로 약 10분이면 정상에 오르게 된다. 캐이블 카편은 일년 내내 운영된다 (단지 안전 정검 시를 제외하고는).

다른 방법은 4월 하순부터 11월 초순까지 운행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필라투스 등산 전철이 Alpnachstad에서 Pilatus-Kulm에 올라간다. 이 등산 전철은 최고 48%의 경사를 가진 세계에서 가장 가파른 아프트식 (치차이용) 등산 철도이다,  [Alpnachstad] 철도 역에 오는 방법은 루체른 역에서 기차로 Alpnachstad역에서 하차 (약 20분 소요) 또는 유람선으로 루체른 역 앞의 선창장 2번에 승선해서 Alpnachstad 하선 (소요 50-90분)하면 된다. 등산전철 역은 가차 역이나 선창장에서 걸어서 2-3분이 걸리는 아주 가깝게 위치하고 있다. 또는 반대 방향으로 루체른 중앙역에서 기차나 역 앞에서 출발하는 호수 유람선으로 Alpnachstad에 가서 여기서 등산철도 정상에서 캐이블 카로 Kriens로 일주 투어를 할 수 있다.   

정상에 역사적인 산장 호텔 [Pilatus-Kulm (27실과 3 스위트)와 현대적인 호텔 [Hotel Bellevue] (20실) 시설이 있는데, 이용 시 일몰과 일출의 광경은 일생에 잊을 수 없는 체험이 될 것이다.  홈페이지: www.pilatus.ch    

Kriens의 캐이블 카 승강장 바로 옆에 한국분이 운영하는 팬션과 식당이 있다. 

홈페이지: www.pilatuspension.com 

= = =

2) Titlis (티틀리스, 해발 3238m)

      © Luzern Tourismus AG -티틀리스정상의만년설의아름다운풍경

Engelberg는 루체른 중앙역에서 [Zentralbahn] 70분이면 닿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휴양마을이며 겨울에는 주위에 겨울스포츠를  즐길있는 중앙 스위스에서 가장 다양한 방문 목적지이다. 여기서 유명한 Titlis 지역이 있다. /  www.engelberg.ch  

중앙스위스에서가장높은산으로다양한겨울스포츠의가능성이있으며또한가장인기있는목적지이다. 빙하로만년설이펼쳐진영봉티클리스는 1내내정상에서스노우스포츠를즐길있고중간역에서는하이킹과산악자전거를타는다채로운것을즐길있다. 엔겔베르크 마을 외곽에 있는 정유소에 환승하여 웅대한 빙하와 인접한 슈탄트역까지 오르면 마지막 구간은 세계 최초 회전식 공중 케이블 로테어 (Rotair)이어준다. 케이블카는 운행 되는데   11정검기간은 제외이다.

정상에는 빙하동굴 (Eisgrotto)있는데 빙하 속을 걸어 가며 만년 어름을 가까이서 있다. / www.titlis.ch

= = =

3) Rigi (리기, 해발 1797m) 산의여왕

[산들의여왕]이라불릴만큼경관을자랑하는산으로유럽에서산악열차가처음만들어진곳이기도하다. 1871년에개통된뷔츠나우 - 리기슈타펠라구간노선이고 2후에정상인리기-클름 (Rigi-Kulm)까지연장개통됐다. 리기칼트바트까지올라가는다른방법은호반의도시베끼스 (Weggis)에서 케이블카로 올라 가는 것이 있다. 겨울에 35km겨울산책로가 마련 되어 있다. / www.rigi.ch 

= = =

루쩨른에서 배로 약 40분. 피어봘트슈태터호(통칭 루쩨른호)의 호반에 발달되어 호수와 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즐길 수 있으며 또 여기서 [리기-칼트바트/Rigi-Kaltbad]에 연결하는 공중 케이블 카의 기점의 마을이다. 리기 산을 좋아한 문호 트웨인(Mark Twain)이 거주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주위에는 포도밭과 과수원으로 펄처 있으며 사계절 아름다운 풍경을 즐길 수 있으며, 고급 호텔이 있는 우아한 분위기의 리조트지이다. www.the-best-of-lake-lucerne.ch

Weggis (붸끼스) – 웰니스 호텔이 많은 고급 휴양지

(c) Weggis Vitznau Rigi tourismus -  중앙 스위스의 아름다운 호반의 마을 들

호반의 도시에서는 몇 년 전부터 [웰니스(Wellness)] 시설을 갖는 호텔들이 개발되었다. 보통 뤨니스 호텔은 5성급이나 적어도4성급호텔에서 새로운 호텔의 매력 상품으로 개발되고 있는데, 이 곳 붹기스에는 3성급호텔도 웰니스 시설을 갖추고 고객들에게 유리한 가격으로 이용이 하도록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벡기스 파크호텔 (Park Hotel Weggis)

5성급 특급호텔로 여러 해 전에 현대 감각에 맞는 실내 장치로 개조되었으며 또 최근에 인기 있는 웰니스용 별관을 증축하였다. 일본식 소 정원, 6실 스파 코티지(Spa Cottages)를 갖춘 웰니스 시설이 있다. 또 1600종류 이상의 포도주를 구비한 스위스 최대의 포도주 저장을 갖고 있다. 여러 해 동안 스위스 10대내의 최상의 호텔로 선정이 되였다.Tel.: +41 41 392 0505, This email address is being protected from spambots. You need JavaScript enabled to view it., www.phw.ch

알렉산더 호텔 (Hotel Alexander)

4성급이며, 아주 조용한 위치에 있는 현대적 휴양용 호텔이다.

Tel.: +41 41 392-2222, This email address is being protected from spambots. You need JavaScript enabled to view it., www.alexander-gerbi.ch

게르비 호텔 (Hotel Gerbi)

4성급으로 아늑한 루쩨른지방풍의 건축양식을 가진 호텔이다.

Tel.: +41 41 392-2224, This email address is being protected from spambots. You need JavaScript enabled to view it., www.alexander-gerbi.ch

위의 두 호텔은 형제가 운영하는 가족 호텔로 몇년 전에 별관으로 만들어진 [웰니스와 미용 세계 – 뷔탈리스/Vitalis]의 시설은 양 호텔 중간에 위치하며 함께 이용하고 있다. 사우나, 약초 욕, 장미 증기욕, 소용돌이 욕장, 물침대가 마련된 휴게실, 마사지와 미용치료실 그리고 매일 [건강과 활력]을 위한 웰빙 프로그램이 마련 된다. 

그라찌엘라 웰니스 및 미용 호텔 (Wellness- & Beauty-Hotel Graziella)

4성급으로 12년 전에 새로 건축된 현대식 독특한 웰니스 및 미용의 전용 호텔이다. 아름다운 루쩨른 호반에 위치하며, [아유르베다]와 [탈라쏘]식 요법이 취급되고 있다. 호텔은 고객의 건강과 활력에 중점을 두고 있다. 터키식 증기욕, 사우나, [크나이프]욕, 일광욕실, 여러 가지 기구를 갖춘 운동실, 사우나와 미용실을 갖추고 있다.Tel.: +41 41 392-7878, This email address is being protected from spambots. You need JavaScript enabled to view it., www.graziella.ch

뢰쓸리 웰니스 호텔 (Wellness Hotel Roessli)

3성급 호텔로 드물게 웰니스 시설을 갖고 운영 하고 있다. 2박/3일 코스에서 시작하여 여러 가지 다양한 페키지 체류가 가능하다. 미용과 스파 센터 [라 미라/La Mira]에는 사우나. 터키식 증기욕, 아로마 증기욕, 로마식 욕탕, 소용돌이 탕, 야외 염수 욕, 마사지 실과 코스메틱 실로 이루어져 있다. 호텔의 위치는 마을의 중심에 있으며, 호반에서 가까워 산책하기에 좋다. 아주 좋은 분위기를 주는 레스토랑도 있다. 가족이 운영하는 친절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호텔이다. Tel.: +41 41 392, 2727, This email address is being protected from spambots. You need JavaScript enabled to view it., www.wellness-roessli.ch

= = =

작성자: 송지열 (Ziyul Song) / www.eurasiatour.info

E-mail: This email address is being protected from spambots. You need JavaScript enabled to view it. / Facebook / www.facebook.com/ziyul.song

Facebook / www.facebook.com/pages/EurasiatourInfo/122944391155017

.

 

Articles View Hits
4320001
Go to top
JSN Epic 2 is designed by JoomlaShine.com | powered by JSN Sun Frame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