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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boldt UniBer     (c) Wikipedia - 베를린의 [University of Humbolt] 의 본관 정면 사진

유덕고려학우회 (留德高麗學友會)

지금부터 꼭 100년전인 1921년 1월 1일 독일 베를린에서 결성된 유학생 단체는 독일에 유학중인 한인학생들을 중심으로 창립되었으며 또한 유럽 최초의 유학생 단체인 것이다.당시에 독일을 [덕국]으로 불리었고 Koreaner를 고려인으로 부른 것에서 위와 같은 유학생회가 [덕고려학우회/留德高麗學友會]로 명명이 되었다. 이곳 유럽을 위해서 독문으로 되지않고 영문으로 [Koryo Students Corps in Germany]로 되어있는 것을 찾아내었었다.*) 창립할 당시 주요 인물은 김갑수(金甲洙)·윤건중(尹建重) 등 11명 내외였으며, 설립 목적은 학생 자체의 발전과 친목을 도모하고 한인의 자치와 외교에 관한 활동을 주관하기 위함이었다.

유덕고려학우회에서 1920년대 독일 거류한인들의 수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1923년의 경우 한인 거류인은 55명이고 유학생은 10개 대학 33명으로 총 88명이었다. 주요 인물은 간사장을 맡고 있었던 김갑수와 서무를 맡고 있었던 윤건중 등이었으며, 1923년의 경우 이극로(李克魯)·김준연(金俊淵) 등이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기록에 의하면 서무 또는 서기에 이극로, 회계에 김필수(金弼洙)가 활동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일제의 자료에 의하면, 1924년 5월 현재 한인 유학생은 58명이라고 하고, 1925년 4월경에는 52~53명 정도라고 한다.

유덕고려학우회의 사무실은 칸트슈트라세칸트슈트라세(Kantstraße) 122번지였고, 자신들의 기관지로『회보(Heba)』라는 잡지를 발행하여 재독한인의 동향과 국내외의 소식을 알렸다. 그러나 이 잡지는 현재 그 실물을 찾을 수 없다. 1925년 10월 당시 제4호가 발간된 것으로 보아 ‘재독한인대회’ 개최 직후인 1924년경부터 출간된 것으로 보인다. 발간에 참여한 주요 인물로는 이극로, 김백평 (金栢抨) 등이다.  이 잡지는 1925년 10월 당시 제4호가 발간된 것으로 보아, 1923년 10월 26일 개최된 ‘재독한인대회’ 이후부터인 1924년경에 출간된 것 같다.

유덕고려학우회의 회원들은 대부분 고학으로 학업을 유지하는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학생 상호간의 구제활동과 상해 임시정부를 지원 및 대외선전활동, 유럽에서 개최되는 민간차원의 국제대회 참가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특히, 유덕고려학우회에서는 1921년 11월경「통고문」이라는 선전문을 발표하여 임시정부 지지와 존속을 위한 입장을 대내외적으로 선포하였다.

『신한 민보』에 의하면, 귀국하거나 미국으로 건너간 학생이 34명이고 남아 있는 학생은 32명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 1924~5년경에 많은 한인들이 독일에 유학하였지만 또한 변화도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한인유학생들이 1924~5년을 계기로 대거 독일을 떠나게 된 것은 학업을 다 마친 것도 한 사유가 되겠지만 독일의 정치·경제의 불안과 가중한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귀국하거나 미국으로 다시 건너간 것이 주된 요인이었던 것 같다.

재독한인대회에서 배포한 선전문에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지도가 크게 그려져 있다. 선전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첫 부분은 오랜 역사를 가진 한국의 독립된 역사 전통과 이를 침해한 일제의 침략과 식민통치,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 사실 등을 적고 있다. 두 번째 부분은 관동대지진으로 나타난 일제에 의한 한인참상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마지막 부분은 한국독립의 열망을 밝히고 독립을 위한 한인들의 투쟁을 각국의 정부와 국민들이 적극 지지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 대회에서 재독 한인들은 일제의 한국지배를 비난하고 독립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6982)에서

유럽 한인의 역사』하(국사편찬위원회,2013)

1920년대 유럽에서의 한국독립운동」(홍선표, [한국독립운동사연구27],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2006)

(본인이 운영하는 본 Website에서 아래의 명단 중에 스위스로 이주한 이한호에 대한 기사를 2014년1월3일 게재 할 때 위의 기사의 일부를 언급한 적이 있다. / Rhi Hanho (이한호) - 스포츠 외교가 (eurasiatour.info) - 제1편의 2장에서 볼 수 있음.

*) Hoffmann, Frank: [Berlin Koreans and Pictured Koreans], Praesens Verlag, Wien 2015 발간, 60/61 페이지에서 

Koryŏ Student Corps in Germany (Yudŏk Koryŏ Haguhoe, 留德高麗學友會) . . .  had been established in January 1921 with Kim Kap-su as its Secretary General and 10 other members. As has already been pointed out in the discussion of An Pong-gun. Kim had been a member of the Korean exile government in Shanghai before coming to Berlin. The student association’s office is at Kantstrasse 122 in Berlin – the same street where An Pong-gun would later live at number 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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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 초에 작성된 남았던 32명 유학생의 명단에 이름과 전공분야는 다음과 같다.

공인태 (수리학), 계정식 (음악), 김백평 (생물학), 김필수 (경제), 김현준 (경제), 김재훈 (음악), 감상수 (의학), 김종성 (공과), 김숙례 (문학), 박성채 (?), 박유진 (법학), 박주병 (의학), 배운성 (예술), 백주 (철학), 안호상 (철학), 원형택 (역사학), 윤건세 (법학), 윤동섭 (문학), 이극로 (경제), 이석중 (의학), 이의경 (생물학), 이훈(법학), 이한호 (공학), 장득우 (공학), 정상종 (경제), 정석태 (의학), 정석호 (음악), 정세희(?), 최(채?)동선 (음악), 최창헌 (공학), 황우일 (경제), 황우림 (?). 참고로 이분들의 전공분야를 분류하여 그 당시의 인기 전공과 들을 볼 수 있다.  

경제: 김필수, 김현준, 이극로, 정상종, 황우일 (5명) // 음악: 계정식, 김재훈, 정석호, 채동선 (4)

의학: 김상수, 박주병, 이석중, 정석태 (4) / 공학: 김종성, 이한호, 장득우, 최창헌  (4)

법학: 박유진, 윤건세, 이훈 (3) / 문학: 김숙례, 윤동섭 (2) / 생물학: 김백평, 이의경(2)

철 학: 백 준, 안호상 (2) // 수리학: 공인태 (1) // 역사학: 원향텍(1) // 예술: 배운성 (1)

미언급 자: 박성채, 정세희, 황우림 (3명)

[유덕고려학우회]는 구제활동·임정지원활동·대외선전활동·국제대회 참가활동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 외에도 [유덕고려학우회]는 포츠담에서 매년 8월 29일을 [국치일]로 삼아 기념식을 갖고 나라 잃은 아픔과 독립의 의지를 되새겼고, 매주 강연 또는 토론회를 열었다. 이관용을 강사로 초청해 강연회를 가졌다. 유덕고려학우회는 1922년 당시 [백림 조선인 구락부] 회관을 마련할 계획을 수립했는데 유학생 대부분이 고학생이라는 어려운 여건 때문인지 구상으로만 그친 것으로 보인다.

위에 언급된 인물 주에 국내외에서 활동한 분 중에 몇 분을 소개하여 본다. 

이의경은 문학가 이미륵(李彌勒)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황해도 해주 출신이며 경성의학전문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하던 중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고, 일본 경찰의 수배를 받자 상해로 망명해서 독일유학을 준비했다. 1920년 독일 [뮌스터슈바르차하 분도회?] 수도원에서 어학 수업을 받았고 1921년 뷔르츠부르크 (Wuerzburg) 대학교 의학부에 입학했다. 그러나 건강 악화로 그 이듬해 휴학하였다. 1923년 [하이델베르크대학교]에 입학했으나 곧 휴학하고 1925년 [뮌헨대학교] 생물학과에 입학해 1928년 본 대학에서 이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독지가인 자일러 교수의 도움을 받아 기거하면서 전공과 달리 「하늘의 천사」·『압록강은 흐른다』 등을 써서 독일사회에 한국과 한국문화를 알리는 문학작가로 크게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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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동선 (1901 – 1953) – 바이올린 연주자 작곡가

채 동선은 1901년 6월 11일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벌교리에서 무역회사를 경영하며 벌교의 이름난 부호였던 채중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100년전 벌교초등학교를 세워 그 당시 교육의 중요성을 깨우친 선각자이며, 또한 송덕비가 세워질 만큼 지역사회의 여러 가지 공익사업에 힘을 기울인 시대를 앞서간 이였던 것 같다. 그런 만큼 자식들에 대한 교육열도 남달라서, 어린 채동선은 여덟 살 때까지 벌교에서도 수십 리 떨어진 순천공립 보통학교까지 때로는 걸어서, 때로는 어른(머슴)들에 업혀서 통학을 하였다. 그는 보통학교 졸업 후에는 서울의 제일고보 (현 경기고교)에 입학하게 된다. 

순천보통학교를 거쳐 서울 제일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시절의 채동선은 홍난파의 바이올린 독주를 듣고 그 소리에 매료된다.  풍부한 선천적 감수성의 채동선은 이때 음악가로의 길을 바라보았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뛰어난 학업 성적과 학우들의 지도적 위치에서 조국의 장래에 대한 걱정으로 민족의식에 대한 투철한 이념을 키워간다. 결국 1919년 '3·1만세사건'이 발발하자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되고, 왜경의 감시가 계속되자 아버지의 권유로 결국 4학년때 경기고보를 떠나 일본 유학 길에 오른다. 

채동선의 이러한 자세는 훗날 그의 음악관을 형성하는 중요한 토대로 작용하였고 이의 실천을 위해 평생 동안 온 몸을 던지게 된다. 와세다대학 입학 후에도 계속하여 바이올린을 공부했으며, 물론 이 시절에도 채동선은 일본 바이올린 계의 원로인 多忠朝 문하에서 4년동안 바이올린 수업을 계속하였다. 대학을 마치고서 영문학과 경제학을 공부하기 위해 잠시 미국으로 건너 갔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포기한다. 

1926년 그는 본격적인 음악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 '슈테르쉔 음악원'(훗날 '베를린 예술대학'으로 확대 개편됨)에 들어간다. 거기서 그는 리햐르트 할체에게 바이올린을 그리고 빌헬름 클라테에게 작곡을 배운다. 

1929년 귀국하여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음악이론과 바이올린을 가르치면서 바이올린 독주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와 제2의 삶을 함께 하게 될 부인 이소란 여사를 만나게 된다. 두사람의 만남은 채동선의 여동생인 채선엽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당시 이소란과 채선엽은 이화여중 동기로서, 나란히 이화여전의 영문과와 음악과에 진학하였고 주위에서 쌍둥이라고 부를 정도로 늘 함께 다니며 다정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채선엽은 이소란에게 늘 오빠 자랑을 하였고, 마침 독일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 길에 오른 채동선을 두 사람이 마중하게 된 것이었다. "그때가 아마 초가을 무렵이었던 것 같아요. 원산항에 바로 도착하여 서울역까지는 기차로 온다더군요. 그래서 선엽씨와 함께 서울역에 밤 9시 30분에 마중 나갔지요. 그런데 독일에서 유학한 학생이라 해서 씩씩하고 야심에 찬 청년인줄 알았는데 매우  수수한 사람이더군요"라고 부인은 당시를 회상하였다.  

1933 년 정지용의 시 (그리워)에 곡을 붙여 그의 여동생인 소프라노 채선엽(蔡善葉)의 목소리로 처음 발표되어 도쿄[東京] 유학생들의 심금을 울렸다고 한다. 1937년에는 작곡 발표회를 갖고 작곡집도 펴냈다. 현악4중주단을 조직하여 실내악 활동을 했고, 1938년 동아일보사 주최 제1회 전조선창작곡발표 대 음악제에서 (환상곡 D단조)를 자신의 바이올린 연주로 발표하였다. 1931년에 이화여전을 졸업한 소프라노 채선엽은 1934년 콜롬비아 레코드사에서  '아! 목동아', '한 떨기 장미꽃' 등을 취입하였고, 1937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일본의 오사카 공회당에서 제1회 독창회를 가졌는데, 당시 '아사이'신문에는 '精度에 들어선   유망한 예술가'라는 평이 실리기도 하였다.   1938년 귀국하여 부민관에서 귀국독창회를 가진 후 계속된 국내 활동으로 그녀는 당대 최고의 인기 성악가의 명성을 누린다. 채동선 집안의 음악적 소질에 대한 일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전통음악에도 관심을 보여 (육자배기), (춘향가)등 민요나 판소리를 채보했고 (진도아리랑), (새야새야), (뱃노래) 등을 편곡하기도 했다. 8·15해방 직후 고려음악협회를 조직하여 협회장에 취임했고 문필가협회 부사장, 국립국악원 이사장, 예술원 회원 등을 지냈으며, 고려합창협회를 조직하여 합창단 지휘를 하기도 했다.

1953년2월2일, 52세에 부산 피난 중 급성복막염으로 죽었다. 1983년 '채동선 기념 사업회'가 그의 부인 이소란과 평론가 박용구 등의 주도로 조직되었고 1984년 '채동선 음악상'을 제정했다.

대표작으로 가곡 (고향, 망향, 그리워), (모란이 피기까지는), 그밖에 현악4중주 바이올린 소나타, 현악모음곡, 교성곡 (한강), 진혼곡(조선), (조국) 등이 있다. 

가곡 '고향', '망향', '그리워'는 같은 곡으로써 정지용의 시 '고향'에 곡을 붙였던 것이나 월북 문인으로 작품규제를 받게 되자 훗날 박화목의 시 '망향'으로 개사되어 불리게 된다. 그러나 이소란 여사 등 채동선의 유족들이 이은상 시인에게 다시 가사를 의뢰하면서 이은상의 '그리워'가 탄생했다. 쓸쓸한 느낌의 곡으로 곡 중에 느림표가 많고, 또 악상의 변화가 심한 것이 특징이다. 작곡가의 그 당시 민족적 울분과 애국을 노래로써 표현하였다. 오늘날 중고교 음악 교과서에는 세 가사가 모두 실려있다고 한다.

http://m.blog.daum.net/sangwhee3801/11294991 /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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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동선 (蔡東鮮, 1901년 6월 11일 ~ 1953년 2월 2일)은 대한민국의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이다. 본관은 평강(平康)이고 호(號)는 산남(山南)이다.

생애: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에서 태어나 일본 와세다 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학사 학위하고 독일 베를린에 유학, 슈테른 음악학교에서 리하르트 하르체(Richard Harchet)에게서 바이올린을, 빌헬름 클라테(Wilhelm Klatte)에게서 작곡을 배웠다. 1929년 귀국하여 4회의 바이올린 독주회를 가졌고,  1932년 작곡 발표회를, 1937년 가곡집을 발간하였다. 현악 4중주단을 조직하여 실내악 발전을 위해 활약하였고, 1938년 동아일보사 주최 제1회 전 조선 창작곡 발표 대음악제에서 〈환상곡 D단조〉를 자신의 바이올린 연주로 발표하였다. 광복 직후 고려음악협회를 조직, 협회장에 선임되었고, 대한음악가협회 중앙집행위원을 역임했다.

작품: 그는 순수한 가곡 작곡에 전력하였으나, 민족음악 문화 수립의 기저로서 민요 채보와 한국의 전통 음악 연구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대표작으로 가곡 〈고향〉 외에 〈향수〉, 〈망향〉, 〈모란이 피기까지〉, 〈바다〉 등이 있고, 합창곡 〈또 다른 하늘〉, 교향곡 〈조국〉, 〈한강〉, 〈현악 4중주곡 제1번〉, 〈현악 4중주곡〉, 〈바이올린 소나타〉, 〈현악 모음곡〉 등이 있다.[1] 1980년에 출판된 《채동선작곡집》에 수록된 〈망향〉이 가장 애창된다.[2]

가족 친척관계: 누이동생: 채선엽(蔡善葉) / 매제: 최규남(崔奎南) / 남동생: 채동규(蔡東圭)

학력: 경성제1고등보통학교 중퇴 / 일본 와세다 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 독일 베를린 슈테른 음악학교 졸업 (바이올린 전공) / 소속: 전 숙명여자대하교 교수

서훈: 1979년 은관문화훈장 (2등급, 추서)

종교: 개신교 (장로회)      

https://ko.wikipedia.org/wiki/%EC%B1%84%EB%8F%99%EC%84%A0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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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린을 든 작곡가  (월간객석, 기사 게재일: 2019년 2월 18일)

음악을 비롯하여 예술의 역사를 보면 어떤 특정 세대로 세기의 기운이 몰려 그 세대에서 유수의 인재들이 튀어나오는 지점이 있다. 현재 20~30대의 바이올리니스트들인 김수연(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오케스트라), 이지윤(슈타츠카펠레 베를린), 박지윤(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등이 전해오는 해외 오케스트라 악장 취임도 이와 비슷하리라 본다.

서양음악이 조선에 처음 유입되었던 때, 바이올린 연주자 세대 중 이같이 빛을 발한 세대가 있다. 홍난파(1897~1941), 채동선(1901~1953), 김재훈(1903~1951), 계정식(1904~1974)으로 대변되는 세대다. 당시 바이올린은 4개의 현으로 되어 있다고 하여 ‘사현금(四絃琴)’, 활로 현을 긋는 보잉을 일컬어 ‘끌다’라는 뜻을 써서 ‘제금(提琴)’  등으로 불리었고, 신문·잡지에 ‘바욜링’ ‘바요링’ ‘양깽깽이’ 등으로 표기되곤 하였다.

지금의 관점으로 일제강점기를 생각한다면 그 시기는 핍박과 억압, 그리고 가난시기이다. 하지만 유학을 다녀온 청년음악가들에 의해 조선에도 어느덧 ‘음악계’가 형성되었고, 그 속에서도 유학 출신국에 따라 일본, 미국, 독일 등으로 파가 형성되기도 했다. 1937년 동아일보 (12월 24일)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오기도 한다(※본문에 수록된 고(古)신문은 당시의 어투를 살렸음을 밝혀둔다).

‘원래 조선의 [바이올린계]는 연주진용 가운데서 가장 아카데미크한 색채가 농후한 것으로서 금년 여름 17년만에 독일서 돌아온 김재훈 씨를 맞이하게 되자 불원 귀국하게 될 안병소 씨를 가하면 채동선 씨 계정식 씨 등 독일계통의 바이올린니스토가 단연 바이올린음악을 리드하고 있음을 본다.’

이른바 ‘독일계통’이라는 것은 조선에서 바이올린을 공부하다가 일본 유학을 거쳐 독일로 유학을 다녀온 학파를 일컫는 경우가 많았다. 홍난파는 일본과 미국, 채동선과 김재훈은 독일로 유학을 다녀왔고, 계정식은 독일유학 후 독특하게도 스위스 [바젤대학]에서 철학박사까지 취득하였다. 이들 중 홍난파, 채동선, 김재훈은 1920년대와 30년대에 연주자로는 물론 작곡가로도 명성을 떨쳤다. 하지만 전문적인 작곡은 아니었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주된 관점이다. 이들이 작곡을 할 수 있었던 환경을 살펴보면, 연주자와 작곡가의 구분이 희미했고, 연주할 수 있는 곡목도 많지 않았을 뿐더러, 설령 그것을 연주한다고 하여도 서양음악을 이해할 수 있는 제대로 된 경성의 관객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조선적 감정’이 녹아 있는 작품을 직접 만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의 음악계를 논할 때 ‘창작’에 관한 문제도 늘 대두되곤 하였다. 당시 여러 음악회를 주최·주관하던 [동아일보사]는 1939년 6월 8일 부민관에 ‘제1회 전조선 창작 작곡발표 대 음악제’를 선보이며, 여러 기획 기사와 음악가들의 좌담회를 통해 창작과 작품의 빈곤함을 여론화했는데, 이를 통해 창작의 기운을 몰아가기도 했다. 이 발표공연이 실체를 드러내기 전인 1938년, 당시 작곡가 임동혁를 인터뷰한 동아일보 기사(12월 3일)를 살펴보자.

 기자: 조선음악계에 있어서는 아직 작곡방면에까지 손이 밎지 안는 모양이라 보는데 어떴습니까?

임씨: 글세요. 동요와 유행가를 제외하면 채동선, 김재훈, 현 제명, 김세형 제씨의 작곡이 있을 뿐이지요. 아, 안기영  씨 것도 있고…

기자: 주로 성악이 많습지오?

임씨: 조선에는 아직 관현악단이 없어 창작곡의 연주를 바랄  수 없는 것이 큰 원인이 겠지오. 아직은 ‘소나타’ ‘심포니’ 를 작곡하는 분이 없어 섭섭합니다. 홍난파씨가 관현악 의 편곡을 많히 하시는데 그런 분이 장차 많이 써 주시겠지요..

기자: 조선에도 빨리 관현악단이 있어야 하지 안습니까

임씨: 개인끼리 모여서는 성립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일본 신향(新響)은 지금 JOAK(동경중앙방송국)에서 매년 12만원을 보조 받는데 (…) 또 제일 먼저 지휘자도 있어야 하겠고 아직은 실현은 막연합니다. 

이처럼 창작을 위한 환경이 좋지 않음을 시사화한 기사가 1930년대 후반의 것이니, 홍난파, 채동선, 김재훈이 작곡을 진행했던 1920년대와 30년대 초반은 더욱더 상황이 좋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들이 해외에서 바이올린과 함께 작곡을 공부했지만, 작곡기술이 동요나 가곡, 바이올린 독주로밖에 구현될 수 없었던 이유는 위와 같이 여러 악기가 총체화된 관현악의 부재했을 뿐만 아니라, 독주와 관현악의 중간층위를 이루는 실내악 문화의 부재에서 오는 한계였다. 한마디로 연주할 수 있는 환경이 고려되지 않은 작품은 연주될 수 없었고, 작품 역시 사회적 파장과 의미를 획득할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작곡은 그것을 연주할 수 있는 ‘자신’을 최우선 순위에 두고 행해질 수밖에 없었다. 채동선이 실내악 작품을 남길 수 있었던 것도, 그가 현악 4중주라는 활동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럼 이번 호는 당시 연주자와 작곡가 양 길을 걸었던 홍난파, 안병소, 김재훈의 삶과 작품인생을 ‘바이올린을 든 작곡가’라는 주제로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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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유학을 거친 스타 바이올리니스트 채동선

채동선(1901~1953)은 홍난파보다 4년 뒤에 태어났다. 채동선과 홍난파는 조선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명성을 떨쳤지만, 채동선의 삶은 홍난파와 좀 다르다. 홍난파가 클래식음악 외에 동요·가곡, ·재즈, ·대중가요, ·신 민요는 물론 유성영화가 도입된 후 영화 ‘춘향전’이나 영화음악, ‘애련송’ 등까지 아울렀다면, 채동선은 바이올린 연주와 가곡 및 실내악 작곡 외에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게다가 일제의 압박이 가혹해지던 일제 말기에 두 사람이 취한 태도도 그렇다. 3·1운동과 안창호가 이끄는 흥사단에서 활동했던 전력과 친일 가요를 작곡한 양면 사이의 선 있기를 통해 홍난파를 바라보아야 한다면, 채동선은 일제의 압박에서 음악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해버리고 칩거를 했었다. 그러고 나서 그가 한 것은 수유리에 땅을 사서 농사를 지은 것이었다. 심지어 화훼농사도 했는데, 그가 재배한 꽃들은 너무 예뻐서 고가에 팔려나갔다고까지 한다. 밤에는 민요를 부지런히 채보했다. 물론 선조로부터 이어져 온 재산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하지만, 이러한 점은 일제말기에 유명 음악가들이 걸은 세속의 노선과는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전라남도 보성에서 태어난 채동선은 순천 공립보통학교 졸업(1915) 후 경기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 전신)에 진학했다. 재학 중 홍난파로부터 바이올린을 개인적으로 사사했다. 그는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다가 감옥에 갇혔지만, 보성의 대지주였던 아버지가 힘을 써서 함께 했던 동지들을 남겨둔 채 그만 홀로 감옥에서 나오게 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학교를 그만둔 그는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는 가운데 4년 동안 바이올린을 부지런히 배웠다.

음악으로 방향을 돌린 채동선은 1924년 독일로 유학을 갔고, 전공도 바이올린으로 바꾸었다. 그는 [슈테른 음악원]에서 리하르트 하르처에게 바이올린을, 부전공으로 클라테에게 작곡을 배웠다.

1929년 9월 귀국한 그는 조선의 스타가 되어 있었고, 11월 경성 [장곡천정 공회당]에서 독주회를 가졌다.

‘일직이 고등보통학교시대부터 바이올린에 특별한 취미를 가지고 공부를 시작 하야 동경 유학시대에도 침식을 잊어버리고 밤과 낫으로 바이올린에 정력한 결과 조도전문과 [와세다대학]를 마칠 때에는 벌서 그의 명성이 일본악단에 울리게 되어 (···) 사도에 더욱 정진하겠다 하야 독일에서 육년동안을 전공하였다 한다.’(동아일보 1929년 11월 21일)

[도쿄신교향악단]에서 활동하던 홍난파가 귀국한 것도 같은 해였다. 이 시기는 홍난파가 작곡에 보다 몰두한 시기이기도 한데, 그것은 어쩌면 채동선의 재능과 천재성을 알아본 홍난파만의 조용한 방향 틀기라 해석할 수도 있겠다.

채동선은 1930년 이소란과 결혼 후 활동에 박차를 가했고, 귀국 독주회 이후 3회의 독주회를 이어갔으며, 1932년 작곡 발표회를 갖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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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를 게재하는 본인은 1956년부터 1964년초 독일에 유학차 떠날 때까지 서울시특별시종로구혜화동에 소재하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혜성교회]에서 교회 생활을 하였으며, 지금은 작곡가의 차남이고 미국 L.A.에 거주하는 채영규씨와 가끔 교신을 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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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 40여년 후 [대한민국]이 수립된 후의 독일의 유학생 모임에 대해서 /

Toesuhoe 퇴수회 - 유학생학술모임 (eurasiatour.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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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지열 (Ziyul Song) / www.eurasiatour.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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