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유럽 방문지 (5) - 모스크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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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scow (모스크바) - 이승만의 유럽방문지 (5)
(c) Wikipedia Pic. - 일본의 세력 제재를 위해 방문한 [모스크바] 역의 풍경
李承晩은 4월25일에 미국의 길버트 (Prentiss Gilbert) 총영사를 초청하여 점심을 같이했다. 소련방문 문제를 상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두 사람은 Gilbert의 차로 조금 떨어진 시골로 나갔다. Gilbert는 그곳이 조용히 이야기하기 좋은 곳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두 사람이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자 일본사람 한패가 들어와서 다음 방의 테이블을 차지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점심을 먹고 나서 다시 시골로 나가서 길가에 차를 세우고 문을 잠갔다. 그는 한국문제를 연맹에서 다루는 일은 중국대표 이외의 다른 회원국의 협조를 얻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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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은 그의 소련방문 계획에 대해 이야기했다.
『한국인들은 지금의 극동 정세의 추이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고, 일본이 열강과 충돌사태로 가게 될 상황이 일어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한국의 독립을 되찾을 기회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시베리아에 거주하는 백만 한인들은 비밀히 러시아인 사관 밑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나는 전에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에 오래 살았고 현재 취리히에 살고 있는 한 한국인과 동행하여 시베리아에 가서 그곳의 한인지도자들과 만나서 재정원조 문제를 토의하려고 합니다. 소련 주재 중국대사 안혜경씨가 소련관리들을 설득하여 협조와 보호를 받기를 희망합니다. 소련은 일본을 반대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행동에 호의적일 것으로 생각합니다』
Gilbert는 李承晩의 소련방문 계획이 흥미 있는 일이라고 대답했다. 李承晩은 그에게 이 이야기를 비밀에 부쳐 달라고 했으나, Gilbert는 그대로 본국정부에 보고했다. Gilbert와 헤어진 李承晩은 오후에 국제연맹 중국상주대표 胡世澤 (Hoo Chi Tai)을 만났다. 李承晩은 그에게 구한국이 세계 각국과 맺은 조약문이나 그 밖의 적당한 자료들이 국제연맹에 등록되어 있는지 알아보아 달라고 했다.
그는 전부터 李承晩을 만나고 싶었다면서, 顧維鈞 (Welligton Koo) 이 이 날 오후에 워싱턴으로 떠나는데 李承晩이 부탁하는 일은 그가 떠나기 전에 상의해야 한다고 했다.
李承晩은 4월28일에 胡世澤을 점심에 초대했다. 그는 顔惠慶 대사를 통하여 소련 당국자들을 만나고 시베리아로 가서 그곳에 있는 한국지도자들과 협의하겠다는 李承晩의 소련방문 계획을 적극 찬성하면서 소련 비자를 받아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튿날 胡世澤이 전화를 걸어 왔다. 소련 대표가 파리와 베를린 가운데 어느 쪽이든지 편한 대로 추천장을 보낼 것이라는 것이었다. 李承晩이 다음 주에 파리로 가겠다고 말하자, 그는 파리의 소련대사관에서 비자를 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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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에 대한 「制裁」 조치 촉구
李承晩은 소련방문 준비를 하면서도 국제연맹을 대상으로 활동을 계속했다. 5월2일에는 중국대표단 본부로 胡世澤을 찾아가서, 국제연맹이 규약 제16조에 따라 일본에 대한 「제재」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제출하는 문제를 상의했다.
그리고 이튿날 「리턴보고서」 채택 이후에 국제연맹에 새로 설치된 중-일 문제에 관한 자문위원회의 의장으로 선출된 스웨덴 대표 크리스찬 Lange를 사무실로 방문했다. 자문위원회는 3월15일부터 활동을 해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극동 상황에 대하여 긴 대화를 나누었다. 랑그는 李承晩에게 일본에 관해서 많은 것을 묻고, 일본에 대한 제재조치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일본은 어떤 나라하고도 전쟁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연맹은 모종의 조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연맹은 일반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빨리 그러한 조치를 취할 것입니다』
李承晩은 한국의 연맹가입 가능성을 물었다. 그러나 Lange의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연맹 안에서 그 문제에 관한 비공식 토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가입할 수 없다는 데 합의를 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시간낭비가 되리라고 생각해요』
Lange는 겸손하고 친절했다. 그는 李承晩에게 찾아 주어서 고맙다고 거듭 인사를 했다. 5월5일에 李承晩은, 소련을 제외하고, 일찍이 한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한 모든 나라 정부에 그 조약문 등을 국제연맹에 등록할 준비를 하기 위해 필요하다면서 자기에게 부쳐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이때의 李承晩의 편지에 대한 미국정부의 반응은 흥미롭다. 李承晩은 5월8일에 헐 국무장관에게 1882년의 조-미 우호통상조약 사본 2통을 보내 달라는 편지를 보냈는데, 혼벡 극동국장은 Gilbert 총영사에게 한 나라의 정식대표도 아닌 李承晩에게 조약문 사본을 직접 송부할 수는 없으나 총영사관에서 간접으로 전달하는 것은 무방할 테니까 그렇게 해달라고 편지를 썼다.
美 국무부는 당시 李承晩의 활동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Gilbert총영사는 반대했다. 李承晩이 조약사본을 원하는 진심을 알아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李承晩이 사본을 받으면 자기에게 [수교 증]을 써 달라든가 하여 미국정부가 공식적으로 이른바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에게 문서를 송부한 증거로 삼으면서 중국대표단의 도움을 얻어 그것을 국제연합에 등록시키려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이 편지를 받은 Honbeck은 Gilbert에게 감사를 표하고 조약사본을 주지 말라고 했다. 그러면서 李承晩의 시베리아행에 관한 보고는 국무부 직원들의 흥미를 모았다고 덧붙였다. 이때에 李承晩에게 조약사본을 보내온 것은 벨기에(Belgium) 정부뿐이었다.
李承晩은 5월18일에 제네바를 떠났다. 그는 트렁크와 밀러(Miller) 박사의 신간 [내일의 시작 (Beginnings of Tomorrow)」을 호텔 직원에게 맡겨 두었다. 李承晩은 바쁘게 사람들을 만나면서도 중요한 신간 서적을 호텔방에서 읽고 있었던 것이다. 胡世澤이 베를린에 있는 독일 주재 중국공사 塵蘇(진소)에게 소개장을 써 주었다.
파리로 출발하기에 앞서 제네바 호 동쪽 끝에 위치한 유명한 휴양지 Montreux에서 이틀 동안 묵었다.
李承晩은 5월21일 오후 2시4분에 밀라노-파리(Milan-Paris)간 급행열차의 3등칸을 타고 몽트뢰를 출발하여 밤 11시10분에 파리에 도착했다.
그는 5월23일에 소련공사관을 찾아가서 제네바에서 보낸 추천서가 와 있는지 물었다. 추천서는 와 있지 않았다. 李承晩은 호세택에게 전보를 치고 편지를 두 번이나 했으나 5월30일까지 회담이 없었다. 그는 베르사유에도 다녀오고 루브르 박물관, 노트르담, 파리박람회, 중국미술전람회 등을 구경하고, 국제 테니스시합도 관람하면서 소식을 기다렸다.
그러면서 또 소련방문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좌우간 우리 일은 일-미 충돌이 나는 때라야 활동력이 생길 터이오, 일-미 충돌은 조만간 면할 수 없을 것이며, 이 충돌이 나는 때에는 노국이 미국과 응원될 터인데, 시베리아 한인이 한 힘을 쓰게 될 터이라. 그러므로 노당국과 협의하고 미국에 돌아와야 원대한 계획이 될 것이오. 이만한 준비가 없이는 장래 기회가 온다 하여도 軍物(군물)이나 경제력에 타 방면 응원을 얻기 불능인고로 모험적으로 가볼 작정이외다.〉28)
이러한 상황 속에서 워싱턴의 張基永으로부터 딱한 소식을 알리는 편지가 왔다. 재정난 때문에 구미위원부의 문을 닫고 뉴욕으로 간다면서 연락은 뉴욕으로 해달라는 것이었다. 李承晩은 그 자리에서 하와이로 구미위원부를 살리기 위해서 워싱턴으로 돌아가겠다고 타전하고, 뉴욕에도 구미위원부를 살릴 것을 당부하는 전보를 쳤다. 이튿날 Hawaii로부터 미국으로 돌아오기 전에 계획된 여행을 하라는 답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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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6일에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에 가보니까 전보 두 통이 와 있었다. 하나는 제네바의 胡世澤이 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하와이에서 온 것이었다. 胡世澤의 전보는 소련 대표가 파리로 추천서를 보내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었고, 하와이전보는 돈을 더 보낼 테니까 소련에 갔다 오라는 것이었다.
李承晩은 곧바로 소련공사관으로 가서 이한호의 비자 신청서를 썼다. 그러나 李承晩은 기재사항을 다 기입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권과 비자신청서를 항공편으로 이한호에게 보냈다. ...
李承晩은 6월14일에 하와이로 전보를 쳐서 내주에 파리로 돌아간다고 알리고, 6월16일에는 자기가 런던에 온 것은 중국 駐소련대사 顔惠慶 박사를 만나 볼 필요가 있고, 영국의회 안의 [한국친우회] 회원들이 지금은 활동할 시기가 되었으므로 영국을 다녀가라는 연락을 했기 때문이었다는 편지를 써 보냈다.
사실 李承晩이 런던에 간 주된 목적은 중국공사관에 소련 비자 교섭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郭泰祺는 소련공사와 좀처럼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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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은 6월23일에 파리로 돌아오고 말았다.
파리에서 소련 비자 받고 비엔나로
이튿날 李承晩은 소련공사관을 찾아갔다. 그러나 소련공사관 문은 닫혀 있었다. 토요일이었던 것이다. 월요일에도 소련공사관 문은 닫혀 있었다. 월요일은 휴무라는 안내문이 나붙어 있었다. 화요일인 6월27일에 Antonov 총영사는 모스크바로부터 회답이 왔다면서 李承晩에게 입국 비자를 내어주었다.
李承晩은 그 길로 체코슬로바키아영사관으로 갔다. 체코슬로바키아영사관은 폴란드 비자를 먼저 받아 오라고 했다. 폴란드 비자를 받아가지고 다시 가서 체코슬로바키아의 트랜지트 비자를 받았다.
이튿날 李承晩은 다시 소련공사관에 가서 이한호의 입국허가가 나는 대로 취리히로 보내 달라면서 이한호의 여권을 맡겼다. 그러고 나서 영사에게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스크바의 정부 당국자에게 소개하는 편지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영사는 본국정부는 이미 李承晩이 누구인지 알고 있고, 그래서 외무인민위원회는 어려운 비자를 내주도록 자기에게 명령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외무인민위원회에 알리면 그들은 기꺼이 李承晩을 만날 것이라는 것이었다.
李承晩은 이한호의 비자에 대한 통보가 올 때까지 제네바로 가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는 6월29일에 파리를 떠나 제네바의 오텔 드 뤼시에 도착했다. 31) 이튿날 그는 하와이로 타전하여 비자가 나왔다면서 여비를 부치라고 했다. 32)
李承晩은 7월4일에 Zurich로 가면서 다시 돈을 스위스의 어느 미국인 앞으로 부치라고 하와이로 타전했다. 취리히에서는 이한호 집 가까이의 개인 펜션에 묵으면서 이한호의 소련 비자를 기다렸으나 감감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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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承晩은 소련 당국자들과 日本에 대한 美·蘇·中·韓 4개국의 공동대응 방안을 논의하고 시베리아의 韓人 指導者들을 만나기 위하여 모스크바로 갔다가 入國拒否를 당하고 하루 만에 돌아왔다.
李承晩은 7월7일 아침에 기차로 Zurich를 떠나서 저녁 늦게 Vienna에 도착했다. 떠나기 전날 그는 다시 Hawaii로 여비를 재촉하는 전보를 쳤고, 하와이로부터는 1주일만 기다리라는 답전이 왔다. 밤 10시20분에 비엔나에 도착하여 호텔방에 들어가자마자 李承晩은 프란체스카에게 편지를 썼다. 이튿날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로 가보았다. 거기에는 프란체스카의 편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李承晩은 오후에 중국공사관으로 가서 董德乾 (Dekien Taung) 공사를 만났다.
李承晩은 그에게 그의 여행계획을 말하고 독일과 헝가리 비자를 받아 달라고 부탁하면서 그의 여권을 맡겼다. 董德乾 공사는 친절했다. 그는 비엔나에 와 있는 소련대사와 [인도국민회의] 의장 파텔(Vallabhbhai J. Patel)씨가 자기 친구들이라면서 李承晩이 Vienna에 머무는 동안 만나 보라고 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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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10일에 李承晩은 American Express에 다시 갔다. 하와이에서는 여전히 아무 연락도 없었다. 그 동안 달러 환율은 급속히 떨어지고 있었다. 李承晩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하와이로 송금을 요청하는 전보를 쳤다.
하와이에서 돈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李承晩은 7월11일에 Budapest에 갔다가 이튿날 돌아왔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에는 아무런 기별도 와 있지 않았고, 달러 환율은 50%나 떨어졌다.
7월14일에 아메리칸 익스프레스로부터 연락이 왔다. 하와이에서 500달러를 송금 했다는 전보가 와 있었다. 이날 李承晩은 董德乾공사의 주선으로 페테르우스키 (Peterwsky) 비엔나 주재 소련공사와 오찬을 같이 하면서 장시간의 대화를 나누었다. 李承晩은 Peterwsky 공사에게 점점 증대되는 일본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하여 미국·소련·중국·한국 사이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그의 비전을 설득력 있게 피력했다.
Peterwsky는 본국 정부로 李承晩의 소련방문을 알리고 李承晩이 모스크바에 도착할 때에 합당한 예우를 하도록 곧 전보를 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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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15일에 李承晩은 드디어 비장한 결의를 가지고 Vienna를 출발했다. 조금 늦게 역에 도착한 李承晩은 매표구 앞에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어서 난감해 하고 있는데, 몸집이 큰 한 미국인이 앞을 가로막아 서면서 「林柏克」이라고 찍힌 한자 명함을 내밀었다. 이 이름을 아시겠습니까?』그는 중국정부의 고문이었다. 1932년 겨울에 워싱턴에서 孫文 기념강연회가 있었는데, 그때에 그는 첫 번째 연사였다. 李承晩은 그때에 논평자로 나중에 등단하여 상해사변 때에 일본군에 맞서 싸운 중국 19로군 이야기로 큰 박수를 받았었다.
『나는 알겠습니다만, 선생이 나를 아시겠습니까?』
『오, 선생은 닥터 리시지요. 워싱턴에서는 정말로 훌륭한 연설을 하셨어요』
사람들이 두 사람을 쳐다보면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李承晩은 그에게 기차시간 때문에 무척 바쁘다고 양해를 구했다.
모든 일이 선생이 바라는 대로 되어 갑니다. 선생은 대통령이 될 겁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그는 줄을 서 있는 부인들에게 李承晩이 얼마나 시간에 쫓기는가를 말했고, 그들은 한쪽 옆으로 비켜서면서 李承晩을 앞으로 가게 해주었다.
李承晩의 짐은 [프란체스카]가 역까지 가지고 와서 발디딜 틈이 없는 바르샤바행 열차 3등칸에 실었다.
董德乾 공사는 역에까지 나와서 李承晩을 배웅하면서 말했다. 『선생의 여행은 매우 중요합니다. 선생이 중국과 한국을 위해서 하시는 일이 모두 잘 되기 바랍니다』
프란체스카는 董德乾 뒤에 서 있는 전송 객들 속에 묻혀 기차가 커브를 돌 때까지 손을 흔들고 있었다.
호텔에 도착하자 外務委員會에 편지 써 바르샤바에 도착한 李承晩은 소련의 비자 기한이 7월12일까지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한 달 동안의 관광비자를 새로 받았다.
(c) Wikipedia Pic. - 모스크바 방문할때 가고 올때 이용한 현재 [와르샤우 역]의 풍경
7월18일 아침 7시10분에 李承晩은 바르샤바를 출발하여 저녁 6시에 폴란드와 소련 국경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모스크바 시간으로 7월19일 오전 9시30분에 그곳에 도착했다.
李承晩은 혹시 있을지 모를 소련의 검색을 염려하여 소련 경내로 들어 가서 부터는 그의 일기에 돈 사용내역이나 인상기는 적지 않았다.
외국인여행자사무소 직원이 역 안으로 들어와서 李承晩과 미국인 두 사람을 맞이했다. 그는 세 사람의 짐을 받아 들고 그들을 대형 링컨 차로 [New Moscow Hotel]로 안내 했다. 호텔은 크레믈린 궁전과 붉은광장 바로 건너편의 Moscow 강둑에 있었는데, Moscow에서는 상류호텔로 알려져 있는 호텔이었다. 많은 미국인들이 그곳에서 묵었다.
눈에 띄지 않기 위하여 李承晩은 다른 관광객들과 함께 자동차로 시내 관광을 하고 오후 2시에 돌아왔다. 외국인여행자사무소 직원인 토빈슨 (G. Tobinson) 양이 로비에서 李承晩을 보자 『외무위원회에서 나온 분이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방에서 기다리시면 올려 보내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李承晩은 비엔나의Peterwsky 공사의 전보를 받고 외무위원회에서 사람을 보낸 것이라고 생각하고 방에서 기다렸다. 그는 외무인민위원회 앞으로 편지를 썼다.
〈외무인민위원회 귀하
바르샤바로부터 도착했습니다. 나는 외무인민위원회의 합당한 당국자 분들과 되도록 빨리 비밀회합을 갖기를 원합니다. 비엔나에 머물면서 Peterwsky소련공사에게 나의 모스크바 방문목적을 설명했고, 그는 찬성을 표하면서 나에게 이곳에 도착하는 대로 여러분에게 알리라고 권했습니다. 나는 뉴 모스크바 호텔에 머물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친절한 회답을 기다리겠습니다.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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蘇聯은 비자 내주고도 入國拒否
오전 4시30분 가까이 되어 李承晩이 편지를 거의 끝냈을 때에 누군가가 문을 노크했다. 문을 열자 Tobinson양이 한 젊은이와 같이 들어오면서 말했다.
『이분이 외무위원회를 대표해서 오신 공무원입니다. 제가 통역을 하겠습니다』
자리에 앉자 젊은이는 퍽이나 정중하게 말했다.
『외무위원회는 선생의 러시아 입국을 허락하는 비자를 발부한 것은 착오에 의한 것이었고 따라서 선생께서 이 나라를 떠나시도록 말씀 드리는 것을 대단히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李承晩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는 파리의 소련공사관이 비자를 발급하기까지의 경위와 비엔나의 영사와 나눈 이야기, 바르샤바 영사관에서 기한이 넘은 관용비자를 1개월짜리 관광비자로 재발급해 준 일 등을 설명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러므로 나는 소련에 입국해서 한달 동안 머물 수 있는 완전한 권리를 가졌소』
그러자 외무위원회 관리는 조용히 대답했다.
『외무위원회는 선생이 누구이시고 선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압니다. 그리고 비자는 잘못된 것이 아니지만 그것은 착오로 발부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생에게 떠나시기를 요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자 李承晩은 물었다. 『비자를 받은 뒤에 내가, 당신들의 이런 결정을 내리게 할 만한 무슨 행동을 한 것이 있단 말이오?』
『선생에게는 개인적으로나 다른 어떤 점으로나 반대할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선생에게 반대할 이유가 있다면 정부는 군대장교에게 선생을 외국으로 추방하라고 명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일은 경우가 다릅니다. 그래서 외무위원회는 그들의 공식대표로 저를 보내어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유감을 표하고 이런 시기에 비자 발부한 것을 사과하도록 한 것입니다』
李承晩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배후에 무엇이 있는지 다 알겠소. 당신네 외무위원회의 진정한 태도를 알려고 왔고, 이제 그것을 알았소. 이곳에 하루도 더 머물고 싶지 않소』
그러면서 그는 자기가 쓴 편지를 들어 적당한 당국자에게 전해 달라고 젊은이에게 건네주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씀 드린 내용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그는 李承晩의 편지를 호주머니에 넣고 정중하게 절을 하고 돌아갔다.
Tobinson양은 입국 비자를 받은 李承晩에게 어떻게 입국을 거부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면서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하라고 말했다.
『어떤 친구도 이 일을 도울 수 없어요. 왜냐하면 이 일은 일본 공포증이 그들로 하여금 나를 그들 나라에 입국하지 못하게 한 것이고, 또 그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나에게 공식 으로 사과까지 했소. 내가 시간을 낭비할 상황이 아니오』
그러고 나서 李承晩은 바로 하와이로 모스크바의 상황에 대하여 전보를 쳤다.
李承晩은 전보를 치고 나서 중국대사관을 찾아 갔다. 顔惠慶의 조카라는 젊은이가 나와서 吳南州(Wu Nan-ju) 공사와 魏艮聲 (위간성, K. S. Weigh) 대리공사가 외출 중인데 곧 돌아온다면서 들어와서 기다리라고 했다. 두 사람은 오후 8시쯤에 돌아왔다.
李承晩은 그들에게 비엔나의 董德乾공사가 써 준 소개편지를 건넨 다음 낮에 있었던 일을 대충 말해 주고, 그들을 만나고 떠나야겠다고 생각해서 왔다고 했다. 두 사람은 진심으로 동정을 표하면서 자기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없겠느냐고 물었다. 李承晩은 단정적으로 말했다.
『지금은 東支那鐵道 문제로 中-蘇 관계가 대단히 긴장되어 있는 때이므로 두 분이 나를 위해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마쓰야마(松山)를 단장으로 하는 일본철도 대표단이 [동 지나철도]의 매입협상을 위하여 모스크바에 와 있고, 중국은 소련이 그 철도를 매각할 권리가 없다고 격렬히 반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고 李承晩은 여행일지」에 적어 놓았다.
日本政府의 壓力 때문이라고 단정
〈일본인들은 나의 행방을 추적하고 있었고 내가 모스크바에 도착하자 일본과 어떤 마찰이나 충돌도 조심스럽게 피하려고 하고 있는 소련정부에 압력을 넣은 것이 분명 하다. 얼핏 생각한 것은 모든 것을 세상에 공표하여 센세이션을 일으킬 뉴스거리가 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더 나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하여 나는 그 일은 나 혼자 알고 덮어 두었다가 적당한 시기에 그것을 더 유익하게 이용하기로 했다〉
李承晩은 두 사람의 권유로 그들과 저녁식사를 같이 하고 호텔로 돌아왔다.
미국정부도 관심을 가지고 그의 활동을 지켜보고 있는 李承晩에게 소련정부가 어떤 판단에서 입국 비자를 내주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리고 모스크바까지 간 李承晩 에게 입국을 거부한 이유도 李承晩의 추측한 대로였는지 확인할 수 없다.
[동지나 철도]의 매각교섭은 5월2일에 발표한 리토비노프 외무인민위원의 전격적인 제의에 따라 日-蘇 양국의 외교경로를 통하여 급속히 진전되고 있었다. 아무튼 이때의 소련정부의 입국거부조치가 李承晩의 공산주의와 소련에 대한 비판의식을 더욱 강화 시킨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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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아침에 李承晩은 기차표를 끊고 비자에 대해 알아보려고 외국인여행자사무소에 갔다가 오후 2시쯤에 호텔로 돌아왔다. Tobinson 양이 어제 본 외무위원회 직원이 왔다 갔다고 했다. 점심을 먹고 호텔 로비에 있는데, Tobinson 양이 그 젊은이와 같이 와서 李承晩과 그 사람을 호텔 매니저의 방으로 안내했다. 외무위원회 직원은 주머니에서 전날 李承晩이 외무위원회에 전해 달라고 써 준 편지를 꺼내어 李承晩에게 주면서 말했다.
『외무위원회는 죄송하지만 이 편지를 받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李承晩은 그에게 편지봉투에 이름을 쓰라고 했다. 그의 이름은 플리겔탄 (Fligeltane)이 었다. Tobinson양에게도 이름을 쓰게 했다.
[나는 아무런 불쾌한 생각을 가지지 않고 오히려 외무위원회가 나에게 표시해 준 매너에 감사하면서 귀국을 떠난다는 것을 그들에게 전해 주시오. 당신이 말하기를 나에게 반대할 아무런 이유가 없으나 상황이 지금은 그들이 나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소. 그들의 공식적인 존경과 사과의 표시는 오히려 나에게 만족스럽소』
李承晩은 이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도 따라 일어났다.
그날(7월20) 밤 11시에 李承晩은 모스크바를 출발했다. 7월21일 밤 11시30분에 바르샤바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자고, 이튿날(7월22일) 아침 7시30분에 바르샤바를 출발하여 저녁 8시30분에 Vienna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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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에 프란체스카 만나
처음에는 모스크바에 가기 전에 묵었던 호텔 [Hotel Kummer]에서 하룻밤 묵으면서 董德乾 중국공사에게 연락하려고 생각했다.
董德乾은 李承晩의 모스크바여행 이야기를 관심 있게 들을 것이었다. 李承晩은 프라하에 가볼 생각도 했다. 그는 董德乾 공사가 체코슬로바키아의 베네시 수상에게 써 준 소개장을 가지고 있었다. 베네시를 통하여 워싱턴에서 알고 지내던 마사리크 (Tomas G. Masaryk) 대통령을 만날 기회도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자면 경비가 수월찮게 들 것이므로 돌아갈 여비가 모자라게 될지 몰랐다. 그리하여 그는 모든 것을 단념하고, 비엔나 가까이의 온천 휴양지 바드 보슬란 (Bad Voslan)의 싼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아마 이때에 李承晩은 프란체스카를 만났을 것이다. 그러나 「여행일지」에는 언급이 없다.
7월25일에 李承晩은 그곳 즉 Vienna을 떠나 그날 저녁 10시30분에 Zurich에 도착했다. 이한호 내외는 李承晩이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정성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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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지열 (Ziyul Song) / www.eurasiatour.info/ This email address is being protected from spambots. You need JavaScript enabled to view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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